[카테고리:] 제6시집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

  • 가을의 파편

    가을의 파편

     

     

    조그만 은행잎엔

    오롯이 가을이 담겨있다

     

    속삭이는 햇살과 나른한 눈빛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의 마음

     

    나는

    가을이 가장 눈부시게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 가슴에 깔고

    세상에 반짝이는 모든 슬픔들

    널어 말린다

     

    꽃처럼 떨어진 젊음들과

    레일에 깔린 비명

    노릇노릇 향기롭게 말라갈 때쯤

     

    !

    세상의 눈물들아 이젠 모두 가자고

    나비처럼 모여 팔랑대는 가을의 파편

     

  •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날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 벌레의 뜰

    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 4월의 눈

    4월의 눈

     

     

    잠 안 오는 밤 접동새 불러

    배나무 밭에 가면

    4월에도 눈이 온다

    보아라!

    푸른 달빛 아래

    다정한 속삭임의 빛깔로 내리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사위

    외로움 한 가닥씩 빗겨지며

    비로소 지상에는 빛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배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손 흔들고 떠난 사람 얼굴마저 흐릿한데

    사월 분분히 날리는 눈발 아래 서면

    왜 홀로 슬픔을 풀어 춤사위로 녹이는가

    접동새 울음은 익어

    은하수는 삼경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는 언약처럼

    분분히 무유의 흙으로 떨어지는 꽃잎

    돌아서서 눈물을 말리는 것은

    다정도 때로는 병이 되기 때문이다

     

  • 꽃으로 피고 싶다

    꽃으로 피고 싶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털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 내려가는 길

    내려가는 길

     

     

    인생길 내려가다가

    길가 풀밭에 편하게 앉아

    풀꽃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서두를 일이 없어서 참 좋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못 들었을까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생명들의 속삭임

     

    올라가는 길에서는

    왜 못 보았을까

    반겨주는 것들의 저 반짝이는 눈웃음

     

    아지랑이 봄날에는 투명한 게 없었지.

    서둘러 올라가

    하늘 곁에 서고 싶었지.

     

    모든 걸 내려놓고 앉은 후에야

    아름다운 것 아름답게 보고 듣는

    눈귀가 열려

     

    노을에 물들면 노을이 되고

    가을에 물들면

    가을이 된다.

     

     

     

    2021. 5. 5

    대전문학93(2021년 가을호)

     

     

  • 고사古寺에서

    고사古寺에서

     

     

    사랑은 저 대웅전 단청처럼

    목탁소리 쌓여서

    바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염불하는 저 노승의 얼굴처럼

    풍경소리에 쓸린다고

    자글자글 주름만 파여지는 것이 아니다.

     

    옅어지며 법당의 향내가 묻어

    더욱 익숙해지고 정이 가는 것

    갈피마다 세월이 익어

    더욱 깊어지는 것

     

    소나무 길로 둘이 손잡고 걸어가면

    넘어가는 노을도

    지나온 발자국을 식지 않게 덮어주는 것

     

    문학사랑137(2021년 가을호)

     

     

     

  •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그리움은

    그리운 채로 그냥 남겨두자.

    밤하늘 별들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어 신비로움이 살아있기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사랑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만나자는 말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만나서 그리움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마음속의 보석 하나를 잃는 것이다. 

     

    2021. 1. 30

     

     

  • 수련睡蓮이 피는 아침

     

    수련睡蓮피는 아침

     

     

    당신의 웃음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의 향기는

    물속에서도 씻겨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낮은 쪽에서

    수줍은 미소로 피어

     

    생우유 빛 살결과

    밀어가 녹아있는 불타는 꽃술

     

    ! 당신은

    한 번 빨려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늪 같은 사람.

     

     

    2021. 1. 20

    문학사랑136(2021년 여름호)

     

  • 찔레꽃 피던 날

    찔레꽃 피던 날

     

     

    찔레싱아 꺾어 먹다

    소쩍새 소리에 더 허기져서

    삶은 보리쌀 소쿠리로 달려가

    반 수저씩 맛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밥보자기 치워놓고

    정신없이 퍼먹다 보니

    밥 소쿠리 텅 비었네.

    서녘 산 그림자 성큼성큼 내려올 때

    일 나갔던 아버지 무서워

    덤불 뒤에 숨어 보던

    창백한 낮달 같은 얼굴 

    하얀 찔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