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基昌
이지러진 조각달처럼
아무도 안아줄 수 없는 고향
섣달 그믐 북녘 바람을 타고
기러기, 기러기,
기러기 떼들이 오고 있다.
가방마다 가득 담아온
도시의 불꽃으로
오늘 저녁 노인들의 창가엔
감빛 꿈이 밝혀질까
굳게 닫아 건 빗장을 풀고
가슴 깊이 묻어둔
고향의 마음을 열까
빈들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의 기도만
저무는 눈발에 덮여 가고 있다.
섣달 그믐 북녘 바람을 타고
기러기, 기러기,
기러기 떼들이 오고 있다.
가방마다 가득 담아온
도시의 불꽃으로
오늘 저녁 노인들의 창가엔
감빛 꿈이 밝혀질까
굳게 닫아 건 빗장을 풀고
가슴 깊이 묻어둔
고향의 마음을 열까
빈들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의 기도만
저무는 눈발에 덮여 가고 있다.
날선 하늘을 이고 있는
홍시감 하나
위태롭게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많은
버스가 섰다가 동구 밖 돌아가면
풀벌레들은 높은음자리표로
높은음자리표로 울어
빈 골목을 채우고,
저녁 연기 시들은 함석 지붕마다
봉숭아 꽃물처럼 황혼이 번지고 있는
아이들아!
불러도 대답없는
고향은 지금 비어 있다.
잿간 어귀에
날부러진 괭이 삽 걸려 있어도
빈집은 빈 집이데.
섬돌 위에는
찢어진 고무신 누워 있어도
빈 집은 빈 집이데.
아이가 버리고 간 인형이 하나
인형의 눈 속에
달빛에 가득 들여 놓아도
빈 집은 빈 집이데……
검은 머리카락에 앉아
리본이 되어 줄 소녀도 없고
시멘트 담벼락에
신문 조각처럼 펄럭이다
물빛 하늘로 목을 축인다.
자운영골엔 봄이 왔어도
자운영꽃이 피지 않고
꽃가루 한 모금 묻히지 못한
더듬이 끝에
트랙터 소리만 묻어 나고 있다.
어릴 때 잃어버린 내 따오기 소리
밤마다 빈집 밝혀 지켜주던
달빛의 눈물이 녹아 있다.
정다운 물들이 어깨동무하고
줄지어 도란도란 흐르고 있기에
인정도 맑아져 구천동 물소리처럼 반짝이며 살아나는
여울에 귀를 담그면
삼베치마 덮고 초록빛 꿈꾸던
어머니 젖내같은 물이여,
담 너머로 떡사발 주고 받던
내 이웃 같은 물이여
오래 보지 않아도
그 노래 그 물빛 마음에 젖어
눈감으면 나직이 우는 가람이여
내 보오얀 솜털로 꿈 갈던
소나무 위엔
갈매기가 집 틀어 살고 있었네.
번지 없이 띄워 보낸
내 풀꽃은
흔적이 없고
맨발 위에 신겨준
꽃신만 한 짝
파란 하늘 보고 돌아누워 있었네.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鳶처럼
영원히 잃어 버린 내 그림자여,
물빛 흔들어 몸을 감추고
닫아 거는 가슴엔
날선 초승달 하나.
정화수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전으로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문틈으로 열여드레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으스름 달빛은 온 세상에 넘실거리고, 검게 가라앉은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꼍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산 밑 장독대 앞에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를 만큼 어머니는 기도에 몰두하고 계셨다. 하얀 사발 안에 우물에서 갓 길어낸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어머님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꼭 감긴 두 눈가엔 간절한 염원처럼 맑은 달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아들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들만은 그 어렵다는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빌고 계실 터였다. 온 새벽의 경건함이 새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님 등 뒤에 둘러져 있고, 찬란한 달빛은 모두 어머님의 두 손끝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온몸이 달빛을 받아 후광에 싸여 있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오신 어머님이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나를 낳고는 겨우 웃음을 찾으시었고, 내가 등창만 앓아도 아버지 밥상에도 놓기 어려운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남가섭암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시던 어머님이다.
나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감동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바라보았다. 잘못 움직이면 어머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깨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살금살금 방으로 뒤돌아올 때도 달빛 아래 그림처럼 그렇게 앉아 계셨다.
『한밭수필』제9호(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