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엄기창

  • 자연법

    자연법

     

     

    수달 한 쌍 들랑 달랑

    식사를 하고 있다.

     

    극락교 아래 물고기가

    한 마리씩 지워진다.

     

    풍경風磬은 아파 우는데

    업연業緣 위에 뜬 구름

     

    큰스님 난간에서

    허허허 웃고 있다.

     

    불법의 나라에서도

    자연법이 우선이지.

     

    나직히 읊조리는 말

    나무 아미 타

  • 그믐달

    그믐달

     

     

    하늘은

    은장도 하나 파랗게 날 세워

    무얼 지키고 있나.

     

    지킬 것 하나 없는

    지상의 마을

     

    부엉새만 어둠을 운다.

  • 봄날

    봄날

     

     

    아파트 정원엔 봄꽃이 다 졌는데

    태화산 골짜기에 와 보니

    봄은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

    사진에 담아 가 무얼 하려는가.

    산은 붓으로 그리지 않아도

    마음에 향기로 배어 있는 걸

    새 소리 몇 소절에 꽃은 아직 피고 있어서

    문득 내 인생의 봄날에

    음각으로 도장 찍힌 사람을 생각하며

    그냥 산이 되어 보았다.

    기다림은

    삶의 옷자락에 찍혀지는 무늬 같은 것

    비웠다 생각하면 언제나 지우다 만

    색연필자국처럼

    초록으로 일어서는 당신,

    신열처럼 세월의 갈피에

    숨어 있다가

    고향에 오면 끓어오르는 봄날이여!

     

  • 삼충사三忠祠의 문

    삼충사三忠祠의 문

     

     

    궁금하지도 않는가보다

    뻐꾸기가 부르는데

    굳게 잠겨있는 삼충사 문 밖에서

    오월의 연초록 목소리로 두드려 본다.

    사람은 바뀌어도 그 자리에 서면

    모두가 의자왕이 되더라.

    민중들의 목소리는 늘

    허공에 흘러가는 바람이더라.

    아프고 아픈 것들 철쭉꽃으로

    피었다가 지는데

    깨져버린 마음처럼

    삼충사 문은 열릴 줄 모른다.

     

     

     

  • 사월

    사월

     

     

    태화산 골물소리에  송홧가루 날린다.

    뻐꾸기 노래에도 노란 물이 들었네.

    술잔에 담아 마시네. 내 영혼을 색칠 하네.

     

    다람쥐 한 마리가 갸웃대며 보는 하늘

    무엇이 궁금한가 연초록이 짙어지네.

    온종일 앉아있으니 내 손 끝에 잎이 피네.

  • 오월

    오월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팝꽃을 피우고 있다.

    리모델링을 한 거리로

    도솔산 뻐꾸기 소리 

     내려오면

    주문呪文처럼 조롱조롱 피어나는

    황홀한 예감

    오래 닫혀있던 그 사람 

    마음의 창이 열릴까.

     

     

    2017, 5, 6 

    문학사랑124(2018년 여름호)

  • 이팝꽃 핀 날 아침

    이팝꽃 핀 날 아침

     

     

    이팝꽃 핀 날 아침엔

    당신의 창가에 커튼이 내려져도

    서러움이 덜할 것 같다.

     

    가로등 일찍 꺼진 거리에

    수많은 꽃잎들이 불을 밝히고

    안개처럼 흐르는 향기

     

    도솔산 뻐꾸기 소리 한 모금

    커피에 타서 마신다.

    온몸으로 번져가는 나른한 행복

     

    하루 종일 바람이 불어

    꽃이 다 지지 않는 한

    닫혀 진 커튼 더 활짝 열리겠지.

     

    아직 잠들었던 작은 봉오리마다

    황홀한 예감들이 깨어나고 있다.

     

     

     

     

  • 바람에게

    바람에게

     

     

    잎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아라.

    심어놓고 흔들어대는데

    잎 필 겨를이 어디 있으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눈 흘기지 말아라.

    뿌리가 다 말라가는데

    꽃 피울 정신이 어디 있으랴.

     

    열매 맺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말아라.

    꽃도 못 피웠는데

    열매 맺을 사랑이 남아 있으랴.

     

     

  • 봄날의 오후

    봄날의 오후

     

     

    지난가을 계족산 고갯길에

    누군가 낙엽을 모아

    큰 하트를 장식해 놓았다.

     

    저마다 화려한 가을의 빛깔들이

    사랑의 무늬로 반짝이고 있었다.

     

    겨우내 사나운 바람 다녀간 후

    산산이 깨어졌을 사랑의 파편을 생각하며

    산길을 올랐다.

     

    땅에 뿌리라도 박은 것일까

    옷깃 하나 흩트리지 않은 하트의 품속에

    종종종 안겨있는 조그마한 하트들

     

    , 큰 사랑이

    또 다른 작은 사랑들을 낳는구나.

    사랑으로 이어진 마음과 마음들이

    긴 겨울을 이겨내었구나.

     

    큰 하트를 만든 사람과

    작은 새끼들을 안겨준 사람들의 사랑을

    벚꽃들 환한 등불 켜고 지켜보는 봄날의 오후.



    대전문학76(2017년 여름호)

     

     

  • 붉은 모자를 쓴 부처님

    붉은 모자를 쓴 부처님

     

     

    누군가 빨간 모자 하나

    돌부처님 머리 위에 씌워놓고 갔다.

    벚꽃이 활활 타오르던 날

    나는 부처님과 어깨동무를 했다.

    마음속으로 팔랑팔랑

    꽃잎이 몇 개 떨어졌다.

    견고한 어깨에서 전해지는

    이 따스한 전율

    목탁 소리도 끊어졌다.

    불법을 덮어버린 삐딱한 빨간 모자

    나는 부처님과 친구가 되었다.

    되나 안 되나 불질러버린 봄 때문에

     

     

    2017.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