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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숙과 정예의 파노라마 – 3시집 춤바위 작품해설

    원숙과 정예의 파노라마

                                 ― 엄기창의 시세계


    조 남 익 시인


     

     

     

    󰊱 화려한 당선, 그후

      청라(淸羅) 엄기창(嚴基昌) 시인이 화려한 당선을 하게 되는 것은 공주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재학중인 22세 때였다. 시전문지 시문학이 창간 2주년의 기념사업으로 실시한 전국대학생들의 전국대학시집에서 그의 아침 序曲이 장현숙(동국대 국문과)작업 Ⅲ」과 함께 나란히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전국대학시집은 시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국대학생들의 시를 모음이란 뜻으로 사용된 듯하다. 시문학의 발표에 의하면 응모가 542편이었다. 예심에 예심을 거듭하여 최종심은 김남조 유경환 두 분에게 의뢰하게 된다.

    당선작 2편이 최고상이었고, 우수작 3, 입선작 42편이 시문학(197312월호)에 모두 발표된다. 이미 오래 전 일을 이렇게 상세히 적는 것은 이에 대한 기록이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엄기창은 공주사범대 수요문학회의 동인이었다. 조재훈 교수의 지도 아래 수요문학회에서는 유병환, 구중회, 최병두, 조동길, 심규식 등이 활동했다. 엄기창의 시문학당선은 수요문학회에 고무적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시문학의 당선작에는 추천이 1회를 거친 것으로 간주되는 특전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대학시집행사는 1회로 끝난다.

    엄기창이 제2회 추천을 완료한 것은 당선으로부터 2년이 되어가던 시문학197511월호에서였다. 추천된 시는 아침바다, 원점에서2편이었고, 추천자는 이철균 시인이었다.

    엄기창의 천료 소감을 보면 시는 나의 거울이다. 내 정신의 몰골을 비춰보며, 끝없이 반성을 되풀이하는 내 양심의 꽃이다로 시작된다. 이때의 엄기창은 ROTC로 임관한 국군 장교(중위)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엄기창과 함께 나란히 천료하게 되는 분이 있었으니 김용재였다. 그는 장시라 할 수 있는 파도 앞에서를 선보였고, 추천자는 역시 이철균이었다. 그는 당시 충남고등학교 교사였다. 한 지면에 같은 지역의 두 시인이 탄생하였지만, 정작 김용재, 엄기창 두 분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용재는 있는 그대로를 살고 싶지 않아서 무슨 변혁의 꿈을 꾸다가 학창에서 즐기던 시공부를 시작했습니다로 천료소감을 시작하고 있다.

    엄기창의 당선작 아침 序曲을 보기로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을 베고 누운 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는 악보 속에서도 살지 않는

    沈澱,

    아침의 곧은 줄기 섬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들로 構想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鮮明하게

    숲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公州師大 國語科>

    ― 「아침 序曲전문(시문학, 197312월호)

     

    아침 序曲20대의 발랄한 젊음과 아침이라는 신선한 이미지가 결합된 환상적인 작품이다. 불과 16행의 이 시가 당선의 계열에 든 것은 노래 (풍류줄 현, 현악기에 매어 소리를 내는 줄. 또는 현악기의 준말) (소리) 등 실제의 아침보다는 음악과 숲속의 햇살을 소재로 한 생명 탄생의 신비를 배경으로 한 때문이다.

    이 시에 대한 당시의 심사평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작품수준이 均等하여 優劣의 큰 차이는 없다고 여겨졌다.반면에 아쉬웠던 점은 個性主張하고 主題들도 그다지 淸新하지는 못했었다 當選을 차지한 嚴基昌作品詩語生硬이 좀 있었으나 透徹을 인정할 수가 있어 이 점을 취했다 말하자면 詩化하려한 作品意圖가 비교적 分明하고 迫進性을 내어 풍긴다.

    金南祚

    시가 기품을 내뿜으면서 엄정한 위의(威儀)에 있을 때 전율할 수가 있다. 삶의 고난이나 체취가 별로 묻어있지 않아도 진정성의 감동은 큰 것이다. 이는 시신(詩神)의 음성, 곧 신운(神韻)의 경지이며, 시의 절창인 것이다. 아침 序曲은 엄기창의 재능이 한껏 승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얀 돛단 배가

    아침의 鍵盤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파도에 몸을 던지고

    잊었던 리듬을 생각하는 갈매기.

    쾌적한 바람이 햇살 층층을 彈奏한다

    미역 숲에서 멸치 떼들이

    五線의 층계를 올라간다.

    갈매기 노란 부리가

    번뜩이는 音樂을 줍고 있다.

     

    2

    밤내 뒤척이던

    허전한 어둠의 꿈 밭

    소라 껍질이 휘파람 불며

    모래알 손뼉을 쳐 뿌리고 있다.

    얼비친 하늘의 푸른 물살을 타는

    갈매기 눈알에

    잊은 리듬이 내려앉는다.

    하늘 속의 빛 이랑이 내려와 앉는다.

    ― 「아침 바다전문(시문학197511월호)

     

    아침 바다원점에서와 함께 시문학의 추천을 끝내게 되는 작품이다. 앞에서 본 아침 序曲에 못지않은 시의 신선도와 리듬 감각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시적 응시가 깊은 안정감을 준다고 하겠다.

    이 시에 대한 추천사는 엄기창 씨에게서는 영원과 순간의 좌점(座點), 그리고 출발과 도착의 동시성을 보았다. 이것으로 2회 추천이 완료되어 시단에 내보내면서 앞날을 축복한다(李轍均)”는 비교적 짧은 표현을 보인다.

     

    󰊲 뜻을 얻어 부활하는 시편들

      엄기창 시인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서울의 천둥󰡕(시문학사, 1993), 󰡔가슴에 묻은 이름󰡕(오늘의문학사, 2004)이 그것인데 오늘의 물량화시대에 비교적 과작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시집 󰡔춤바위󰡕3시집에 해당한다.

    훌륭한 능력도 기회가 없으면 빛이 없다고 하지만, 엄기창 시인의 경우는 화려한 당선 그 후, 인문고교의 교직생활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초기의 단형에 이끌리어 시의 호소력을 등한시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제3시집에 이르러 엄기창 시인의 시혼은 시의 뜻을 새롭게 얻어 부활하는 경지를 선보인다. 초기의 재능이 대기만성의 기틀을 보임이리라. 이제 그는 고독을 깨우치는 연치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고독에서부터 지혜와 관조의 초자아로 확대된 눈을 뜬다. 시가 인간의 묵시록(黙示錄)이라면, 그의 언어에 대한 입증 능력은 서정시의 진경에 기적적인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보기로 한다.

     

    절 마당은

    무량(無量)의 바다로 이어지고

    무어라고 지껄이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 소리마저 지운다.

     

    지워져서 더욱 빛나는

    관음상 입가의 미소처럼

     

    나도 눈보라에 녹아서

    돌로 나무로 바람으로 지워지면

    갈매기 소리 알아 듣는 귀가 열릴까.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 「향일암(向日庵)에서전문

     

    향일암에서는 한편의 서정시로서의 직관과 품격을 갖춘 명징성(明澄性)이 매력이다. 엄기창 시인이 드디어 뜻을 얻어 부활하는 시편인 것이다. 그의 기세는 바야흐로 풍부한 서정과 사고력이 숙성되어 감을 느끼게 한다.

    시인의 사명이 고도의 미적 쾌락을 일깨우는 것이라면, 고차원의 감정, 곧 정신의 성숙인 것이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해방감과 지성의 빛을 은은하게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대중적 취향보다는 고급 독자들의 미학적 가치가 뒷받침될 때, 최고의 성취를 보게 한다.

    그러나, 현대의 서정시, 시의 가치관은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다. 우리가 읽는 시에서 서정시는 압도적인 비율로 많은 편이고, 독자 또한 적은 편이 아니다. 문학의 독자는 국민적 지층에 민도로서 깊이 대중화되어 있다.

    서정시의 오래고 낡은 운명,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전통, 한시조차 그 운문율이나 정서까지 여전히 답습되기만 한다는 것은 무언가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반성과 비판이 있다. 세상이 변해도 서정시는 변하지 않는다는 자책인 것이다.

    그렇다고 난해한 기교와 난삽한 수사를 앞세운 시들, 해독의 틈이 전혀 없는 시들, 일부에서는 아직도 서정시를 쓰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러나 고전적인 경향에서는 여전히 자연은 서정의 원형질이고, 영원한 시의 오브제라고 주장한다.

    불온한 시로 말해지는 시의 혁신은 시인의 취향에 따라 언어와 수사에서, 그리고 시정신의 확산과 깊이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시는 낡은 것조차 청순한 새로운 방식으로 혁파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있다. 시가 언어의 조직이고, 그 언어는 시대의 언어라야 한다는 대전제인 것이다.

    엄기창 시인의 시는 시정신의 개척과 그 입증능력의 고양이다. 그의 시정신은 보다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전통을 이어간다.

    최근 그는 불교적인 상념에서 수준있는 부활을 보인다. 향일암에서」 「마곡사에서」 「부처님의 미소」 「산사」 「가을 산」 「동학사 가는 길등은 모두 이런 취향의 소산이다. 깨달음을 중요하게 작품화하고, 보이는 것과 말하려는 것의 시 본질에 대한 투철한 소명이 있다. 현대적 서정의 맥박을 느끼게 한다.

    향일암에서향일암은 많이 알려진 것처럼 전남 여수시 돌산도의 금오산에 있는 절벽 암자이다. 우리 나라 4대 관음 기도처의 하나이며, 도 지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금오산은 거북이 모양이고, 향일암은 경전을 등에 모신 금거북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지우고 또 지운다는 향일암에서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종연)는 표현에 이른다. 세상의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해 가는 대자연이 뜻밖의 경이로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겉모습만 좇는 것은 바탕을 잃을 수도 있지만, 비어있는 근원으로 돌아가면 뜻을 찾아낸다는 청순한 불심의 울림이다.

    다음 시는 현상적인 현실이면서도 그 깊이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있다.

     

    불타는 단풍 산으로

    노스님이 들어섰다.

     

    산 빛 깨어지지 않고,

    회색 승의가

    단풍에 녹아든다.

    작은 등짐에 담겨온

    속세의 눈물들을

    산문 앞에 부려 두고,

     

    조금씩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비우고 비워 산바람이 된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가에

    울던 새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저녁 어스름으로

    지워지는 산들이

    스님의 등 쪽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 「가을 산전문

     

    고요와 비움의 경지는 청렴하고 결백한 염결(廉潔)의 고향일 것이다. 시에서는 일찍부터 사특함이 없는 정신’(思無邪)의 가치를 추앙하였고, 불교에서는 참선, 안거 등을 비롯하여 그 종교적 정진과 수행에 밀접한 바가 있을 것이다.

    가을 산의 배경은 노스님과 단풍, 새울음과 저녁 어스름 등 소박하고 군소리가 거의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시의 담백과 미적 취향은 적은 것이 아니다. 담담한 풍경을 하나씩 짚어주는 간결성에는 의외로 시적 경이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본래 시는 독창성이라기보다는 미묘한 충일감에 의하여 경이감을 준다. 그것이 퍼스나(persona)의 지고한 사상의 전달로 감동을 주고, 거의 기억처럼 느끼게 한다.

    일찍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서사시인이나 서정시인의 뛰어난 작품은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고 신이 들어서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문학의 천재론의 근거가 여기 있었다.

    작은 등짐에 담겨온/ 속세의 눈물들을/ 산문 앞에 부려두고// 조금씩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비우고 비워 산바람이 된다, 여기의 산바람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시의 직관에서만 가능한 신비로운 초월인 것이다.

    서정주는 눈썹으로 절 짓기가 그의 어법이었고 구경적 생의 형식은 김동리의 문법이라고 한 것이 있다. 서정주가 직관적이었다면, 김동리는 논리적이었다. 시와 소설의 차이였다.

    시의 직관은 잠깐 사이에 고금을 살피고, 눈 깜빡할 틈에 사해를 누른다. 천리를 틀안에 넣고, 만물을 붓끝으로 꺾는다고 했듯이 종횡무진의 상상력인 것이다.

    비우고 비워 산바람이 된다는 것은 이 시의 절구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흔히 문학은 제3의 눈이 있을 것을 강조한다. 자기 속에 있는 영원한 시력, 변함없는 파수꾼, 결코 자는 일 없는 목격자의 눈이 그것이다.

    엄기창이 가을 산에서 보이는 것은 속세를 떠난 정신의 적멸(寂滅)이다. 언어에 의한 입증능력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창작의 매력이 있다. 시가 거룩한 것이라면, 바로 이런 경지 때문일 것이다.

    시는 지식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주변이었다. 모든 학문을 포괄하며, 또한 모든 학문이 이에 근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 명징한 이미지, 알레고리 시학

      어쩌니 해도 수사술은 문학의 본질이다. 특히 시는 말이나 글을 아름답고 정연하게 꾸미고 다듬는 기교적 재능이 큰 영향을 끼친다. 수사술은 자신의 이야기를 신용있게 드러내는 언어능력인데, 정서에 대한 환기, 표현에 대한 입증능력을 뜻한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훌륭한 작품은 사상성과 예술성이 서로 등가(等價)와 조화에 있다고 한 것은 T.S엘리어트였다. 여기의 예술성이란 바로 수사술을 지칭한 것이다. 수사의 세련성, 거시적 가치의 심미성, 독자적인 문채(文彩) 등은 대가들의 명작에서 접할 수 있다.

    엄기창 시인의 언어는 비교적 명징하고 간결하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단형으로 빛을 내었고, 2시집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 세월을 주로 단형에 몰두한 감이 있다.

    현대시에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이미니즘, 이미저리(여러 이미지들의 집합적 명칭) 등은 낯익고 흔한 용어들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애매성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저리만 해도 그 적용 범위는 시의 독자들에게 경험된다는 심상’(이미지)으로부터 시의 요소에 이르는 총체적인 데까지 달한다. 이미저리는 비유언어, 곧 은유와 상징을 가장 광채있는 부분으로 보며, 모순과 충돌하는 언어를 수용함으로써 탄력적인 현대시의 규범에 이른다.

    엄기창의 단형에서 가시를 보자. 그 이미지가 선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볼멘소리 아내의 노여움과 탱자나무의 가시가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숨기다가 숨기다가/ 무심코 튀어나온/ 아내의 볼멘소리처럼// 수줍게 고갤 내민 탱자나무 새순에/ 가시/ 하나의 불과 42자의 단형이다.

    이미지란 말로 만들어지는 그림이다. 한편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는데, 그것은 시를 구체화할 때 가능한 것이다. 가시는 구체화된 한 편의 이미지이며, 매우 예리한 바가 있다.

     

    물총새의 눈동자가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 「황혼 무렵전문

     

    황혼에 물총새가 총알처럼 날쌔게 물속의 먹이를 낚아채는, 물고기의 사냥을 소제로 한 시다. 그런데 단순히 사실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여러 해설적의미장치를 배치한다. 그것은 곧 풍경적 묘사가 아니고, 시인의 의도적 철학과의 연쇄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1),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2),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4) 등이 그것인데, 단말마적인 상황이 중후한 시의 의미로 채색된다. 변화된 시의 기법으로 진보적인 수사술일 수도 있다.

    물총새의 냉정한 살기를 돌의 적막’ ‘바위의 응시라고 한 것도 그만의 비유라고 하겠다.

    30년대만 해도 시는 풍경 등 외면적인 감각에 더 많이 열중했다. 관념이나 심리적 사상까지도 시의 회화성으로 바꾼 것이 김광균(1914~1993)이었는데, 결국 그의 시에는 사상이 스며들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예술적 표현이란 마음 깊은 곳에 접하는 일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상성은 도저히 경시할 수 없는 문제로 대두된다. 황혼 무렵은 약육강식의 구도이지만, 냉정한 대자연의 근원인식에서 포용된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다.

    알레고리(allegory)의 서양 원어의 뜻은 다른 것을 말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우화(寓話) 우의(寓意) 등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라 할 수 있고, 교훈적 풍자적인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빗대어 넌지시 비추어 쓰는 수사법인 것이다.

    우의소설(寓意小說)에서는 빗대어 쓴 것이 이야기가 되겠지마는 시에서는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나게 된다. 내용의 음영이 비유나 설명이 겉으로 드러난 이상의 숨은 내용이 암시되는 것이다. 가령 대부분의 속담은 이런 전형에 속하는데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등이 그러하다.

    알레고리는 우화법 풍유법 우유법 등의 번역을 볼 수 있다.

    엄기창 시인의 첫시집의 서울의 천둥이나 등은 원관념은 드러나지 않고 보조관념으로만 된 알레고리를 본다. 서울의 천둥은 너무도 복잡한 서울에 대한 위기의식의 풍자가 천둥이고, 이의 원관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은 사랑의 원관념이 보조관념만을 거느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제3시집에서도 파계(破戒)」 「똥을 묻으며」 「맹인(盲人)의 그림 보기」 「바다등은 작품의 의도가 따로 있는 작품들이다. 알레고리의 시학은 지혜의 소산이며 의도된 방략(方略)’의 작품이기 때문에 주제가 너무 선명할수록 작품성은 떨어지게 된다. 예술성을 중시할수록 세련된 표현을 취한다. 사실 주제가 정신적 도덕적 역사적 또는 정치적으로 너무 표면화될 수는 없다.

    엄기창의 단형인 바다를 보기로 한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는 것이 전문이다.

    광대한 바다의 맑은 물이란 실은 황하가 그의 누런 물을 씻고 또 씻어 맑게 되었고 하늘을 닮은 것이라는 이야기로 교훈적인 내용이다. 사회의 악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 오히려 나의 인격적 성장에 좋은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이 시는 가르친다.

    이솝우화는 가장 널리 읽히는 대중적 알레고리로 되어 있다. ‘동물 우화는 특히 그 교훈이 직설적이다. 가령 포도 우화에서 여우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가 없다고 핑계대는 것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엄기창의 맹인(盲人)의 그림 보기에는 맹인 지팡이 짚고 미술 전시회 가네”(2)로 이 시가 진행한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하나밖에 모르는 놈들/ 맹인은 산수도에서. 우주를 보네// 앞을 못 보아서/ 더 큰 세상을 보네”(4.5)로 끝난다.

    대부분 사람들은 두 눈을 가지고서도 하나밖에 못 보는 놈들이지만, 맹인은 오히려 더 큰 세상을 보네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는 맹인의 심안(心眼)을 예찬하면서 세상을 질책한다. 아이러니가 섞인 날카로운 알레고리이다.

    엄기창 시인은 정연한 시작법에 골몰한다. 이 난해시가 판치는 시대에 적은 듯 뜻을 얻고 표현의 정도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 겸허한 선생님이자 시인의 자아가치

      시인에게는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적으나마 속내 깊은 자존심 같은 것이 숨어 있다. 시인은 일찍부터 시인은 세계의 마음이다또는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입법자이다.” 등을 읽으며 시를 쓴다.

    시인들은 귀기(鬼氣)가 서려있는 보들레르의 새로운 전율적 창조27세로 요절한 중국 중당기의 이하(李賀)의 시편들도 조금씩은 공부한 터이다. 국내의 고전적인 시인이나 작품은 거의가 학교 교육에 들여온다.

    시는 항상 속세와의 일정거리를 둔다. 속세란 우리의 삶이 사는 늪이지만, 지고한 문학의 관조를 위해서는 그 흙탕물을 다 뒤집어 쓸 수는 없다. 설령 죽음과의 슬픔이 있어도 작품에서는 고급스럽게 녹여 놓는다.

    장자의 말처럼 신발이 맞으면 신발의 존재를 잃는다는 것은 정신적 달관과 조화가 얼마나 기초적인가를 알게 한다. 예술이란 필연적으로 소아의 세계가 아니라 대아적인 소명의식이라야 공감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엄기창 시인은 전형적인 그것도 공주가 낳은 시인이다. 온후한 그의 모습을 보면 진선지인(眞善之人)이란 바로 저런 사람이겠지 한다. 근본이 착한 사람, 그늘이 없어 보이는 얼굴인 것이다.

    조재훈 교수는 첫시집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엄기창 시인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의 원고를 통독하다 보니 그는 아직도 유년의 고향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느릿한 말씨와 부처님의 미소인 듯 따사로운 그의 소리 없는 웃음이 그의 사람됨과 문학의 성향을 모두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겸허한 순결성이라고나 할까? 노자가 일찍이 갈파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처럼 낮은 데서 표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엄기창이란 선생님이자 시인이다.

    조재훈 절제와 스밈의 시학

    엄기창의 이런 바탕은 첫시집에서 연번호가 없는 고향연작시 5, 금강2편이 나온다. 2시집에서는 부제 思母十題에 의한 모친의 장례에 이르기까지의 10, 그리고 시의 제목에 공주, 대전, 공산성, 대청소, 계족산, 현충원, 계룡산 등의 지역 지명들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시가 공감성이 적은 소아적인 소재나, 사사로운 편견에 갇힌다는 것은, 시의 소주제에 스스로 갇힌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는 엄기창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의 시가 최소한의 공공성, 대아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지 않고 편견의 사사로운 유희로 쓰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는 삼국유사를 탐독하면서 시의 구상을 다듬는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시집 󰡔신라초󰡕 󰡔동천󰡕을 비롯하여 그의 명시들이 이런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엄기창 시인의 경우는 그의 겸허한 순결성의 자아가치에서 햇빛 같은 시의 구원을 본다. ‘자아가치는 천지만물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주체인 자아가 성스러운 만족·보상·탕감 등의 태생적 경지를 소요하고 있음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선지인이었고, 공리적인 세상에서 높은 초월의 인성적 감동으로 시의 질을 잡는다.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

     

    경적을 울리면

    아기 비둘기 놀랄까봐…….

     

    산을 오르다가

    허리 구부러져 누운 들국화를 보면

    발을 멈추고 튼튼한 이웃에 기대어 준다.

     

    가벼운 바람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잠시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내 따스한 마음 머물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

     

    단풍잎 붉은 기운이

    핏줄을 타고 들어온다.

    바람은 차도 가을은 따뜻하다.

    ― 「따뜻한 가을전문

     

    따뜻한 가을은 역시 뜻을 얻고 있는 작품으로 따뜻한 시인의 마음이 곧 깨끗한 시가 되었다. 비둘기들이 놀랄까봐 차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든가, 등산길에서 구부러진 들국화를 세워준다든가 등은 쉬운 일 같으면서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 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6) 하고 시인은 나의 온기에 대해서 깊은 뜻을 헤아린다. 이런 마음씨를 자비심이라 할 수 있고, 불성이라고들 할 수 있겠지만, 시인은 일상의 생활감정에서 찾아낸다.

    시의 표현이 순수하고 내용이 성숙된 것을 본다. 바로 완숙의 세계인 것이다. 예술을 신성시한다든가, 마술적 열광을 높이 사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가 복잡할수록 존경스럽고 성화(聖化)와 같은 감화의 순치 또한 얼마나 값진 일이겠는가.

    본래부터 시는 진선미(眞善美)였다. 인간이 이상으로 삼는 참다움·착함·아름다움인 것이다. 셸리는 그의 시의 옹호에서 시는 지복지고(至福至高)의 마음의 지고지복(至高至福)의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한다. “지극히 높고 지극히 행복한 기쁨의 경지에서 시는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 정신적인 극치의 환희인 것이다.

    아름다움에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이 있음이다.

    시 한 편을 더 보기로 한다.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

     

    산밑 낮으막한 등성이에서

    불꽃을 피워 올려

    산벚꽃 연분홍으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

    온 산을 덮는 봄날의 환희와

     

    비온 날 아침 떡시루를 찌듯

    뭉게뭉게 일어나는 골안개로 온 몸을 가렸다가

    한 줄기 햇살로 맨살 드러내어

    진초록 함성 하늘 향해 이글거리는 여름날의 열정,

     

    늦여름 초록의 밑둥에서 조금씩 배어나와

    색색으로 물들였던 산의 간절한 이야기 떨어지고

    나무 가지마다 침묵으로 앙상한

    저 가을날의 고독

     

    시루봉 이마 하얀 눈으로 덮이고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옅어졌다가

    어느새 수묵의 함초롬한 자세로 식어있는

    겨울날의 허무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

    ― 「유리창을 닦으며전문

     

    유리창을 닦으며는 같은 계열의 엉겅퀴꽃의 노래와 함께 활성적인 시인의 인식과 정서가 녹아든 원숙함을 보인다. 기교적으로도 함축적이다.

    6연의 이 시는 처음과 끝에서 수미상관의 묘미를 응용한다.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첫연),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종연)가 그것인데, 전체적 균형을 잡/아준다. 대전의 명산인 보문산의 비밀’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의 발상법이 이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엄기창 시인은 역시 자질과 열정을 갖춘 시인이었다. 화려한 당선 그 후, 그는 이상하게도 영광의 상처처럼 너무 오래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단형에 얽매였던 시의 틀을 과감히 깨고, 대기만성의 원숙과 정예의 파노라마를 일으키며 기적적인 부활을 보인다.

    그는 시의 뜻을 얻었을 뿐 아니라 깨끗한 서정과 함께 시를 응용하는 시력도 함께 회복한다. 그는 시의 광야에서 선지자의 넋을 마음껏 외칠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을 넘기도 어렵지만, 자신을 넘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엄기창 시인은 무한한 시의 세계를 끝없이 동경하며 그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내공이 있었기에 부활될 수가 있었다. 더구나 그의 시는 평이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메아리가 있다. 현대시의 리듬과 표현기교, 그리고 전반적인 예술성의 수준을 유지한다.

    릴케는 일생의 10편의 좋은 시를 쓰기 어렵다.”고 했다. 겸허하고 순결한 엄기창 시인의 영혼과 열정을 축복하면서 그의 앞길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다.

     

  • 절제와 응축으로 피어난 생명 탄생의 신비

    <해설>

     

    절제와 응축으로 피어난 생명 탄생의 신비

                                               엄 기 창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序曲」 전문

     

      위의 시 「아침 序曲」은 1974년 월간「時文學」지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백일장’에 장원으로 선정되어 『時文學』지에 초회 추천을 받은 시이다. 내가 붓을 꺾지 않고 지금까지 시의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침 序曲」의 장원 입상이 그 때 마침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내 자신에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序曲」에서 용기를 얻어 이 날까지 탈선하지 않고 꾸준히 시를 썼고, 부족하지만 두 권의 시집도 상재하였다. 이 시 이후에 태어난 시들은 이 시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 시의 자식들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당신의 대표 시가 무엇이오?”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침 序曲」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태화산의 새벽 숲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맑고 신선하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나는 공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선생님이 사시던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숲길을 거닐면서 태화산의 새벽 숲에 매료돼 버렸다. 햇살이 번지기 전의 차갑도록 청신한 공기와 막 잠에서 깨어 “찌르르 찌르르” 울고 있는 나지막한 새들의 울음소리. 어둠 속에 잠들었던 새 생명이 여명 앞에 실체를 드러내어 약동하는 생명 탄생의 신비를 나 혼자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숲에서 벌어지는 생명 탄생의 모습을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참신한 시를 쓰고 싶었다. 이 세상 그 어느 생명보다 은밀하게 태어나 새벽 숲에 햇살처럼 번져가는 생명을…….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수요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시를 보는 안목과 시를 쓰는 실력도 많이 성장하였다. 그 때 나는 드디어 오래 간직했던 기억의 창고에서 그 때 그 마곡사의 새벽 숲에서 느꼈던 생명 탄생을 훔쳐보던 감흥을 시로 형상화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조재훈 선생님은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작품 해설 「절제와 스밈의 시학」에서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재훈 선생님의 평대로 이 시는 극도의 응축과 절제를 통해 만들어진 여백 속에 너무도 정갈하고 신선하여 신비하기까지 한 태화산 새벽 숲에 태동하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가)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나)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다)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라)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위의 (가)~(라)에서 ‘音’, ‘노래’ 등은 ‘생명’을 상징하는 시어들이다. (가)에서는 이미 만들어져 악보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고, (나)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의 목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 (다)에서는 가장 곧고 성센 가지를 골라 생명이 태동하는 모습을 (라)에서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더 이상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언어의 절제 속에 당시 심사위원장이셨던 김남조 선생님께서 “생경할 정도로 참신한 이미지와 그를 받쳐 주는 탄탄한 구조가 너무 아름다워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으로 선정하였다”는 말씀대로 생명이 탄생하는 숨막히는 순간을 투명하게 그려내었다.

      서정주 선생님은 생명 탄생의 신비를 지켜보는 감흥을 그의 시 「국화옆에서」에서 “노오란 네 꽃잎이 필랴고/ 간밤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라고 노래하셨고, 이호우 선생님은 그의 시조 「개화」에서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고 노래하셨다. 고요한 새벽 숲, 새의 목 너머에 숨어있던 새로운 생명이 소리로 튀어나와 햇살처럼 평화롭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는 감흥을 나는 너무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일까!

      나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의 벽에 이 시를 시화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마다 읊조리며 기도한다. 어린 시절 태화산 새벽 숲에서 보았던 새 생명의 태동과 그로 인한 평화가 이 시로 인해 우리 집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평화를 주기를.

  • 이달의 문제작 시

    이달의 문제작 시>

    향일암(向日庵)에서

    절 마당은
    무량(無量)의 바다로 이어지고

    무어라고 지껄이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소리마저 지운다.

    지워져서 더욱 빛나는
    관음상 입가의 미소처럼

    나도 눈보라에 녹아서
    돌로 나무로 바람으로 지워지면
    갈매기 소리 알아듣는 귀가 열릴까.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시문학> 2008년 10월호

    엄기창 시인은 암자를 찾아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는다. 그런데 시인은 ‘향일암’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아니 절에서 바다를 읽는다. 바라봄의 인식 과정을 통해 ‘바다’와 ‘절’을 한 몸으로 동화시켜버린다. 지상과 바다가 하나로 연결되고, 바다 위를 비행하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자신조차 무화된다. 이 무화 혹은 몰각의 상태는 ‘지움’의 과정을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를 획득한다. 하여 종국에는 ‘목탁소리마저 하얗게 지워’진 상태에 도달한다. 조용히 지워지는 사물을 바라보며 화자는 평안한 서정에 젖는다. 아니 자신도 ‘녹고, 지워지기’를 소망한다. 꿈꾼다. 그 지워짐을 통해 ‘귀’가 열리길 기대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을 깨달음처럼 독백한다.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고. 화자는 향일암의 기행을 통해 ‘지움’과 ‘비움’이라는 소거, 소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바다처럼 출렁이는 인간 세계의 욕망들을 지우고 비우고자 하는 화자의 희구가 맑고 추워서 서늘한 세한도처럼 깨끗하다.

    양병호, ‘기억과 추억이라는 이름의 환상열차’
    <시문학> 2008년 11월호

  • 절제와 스밈의 시학 – 嚴基昌 作品解說

     

    ☐嚴基昌 作品解說



    절제와 스밈의 시학


                                                           조  재  훈

                                          <시인. 공주대학 국어과 교수>


    * 시인의 연장선상에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T.S.엘리어트는 그의 여러 논문 가운데에서 힘주어 말했고, 그 영향으로 이른바 영,미의 이십세기 초반 분석 비평가들은 무슨 의도의 오류라든가 영향(정서)의 오류 등을 내세우면서 작품으로부터 작자와 독자를 단절시킴으로써 작품의 유기체적 자율성을 강조한 바 있다. 윤리,도덕 또는 역사적 비평이 지배하던 당대 문학연구 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이해된다. 가령 소쉬르의 언어이론도 십구 세기 유럽의 언어학을 지배하던 독일 라이프니츠대학 중심의 낭만주의적 역사비교언어학의 거부에서 태어난 것이며 그것은 둘 모두 자본주의 발흥과 기계문명의 첨단화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기초하여 생겨난 파리의 구조주의나 기호학은 가장 적정한 최신의 그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문화를 지탱하는 역사, 경제 등을 살펴,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따라서 작품 안에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다 들어 있다는 견해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역사의 왜곡이 심한 제삼세계 등의 겨레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이러한 말을 늘어놓는 까닭은 엄기창의 사람됨과 나와의 인연을 조금이나마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서다.

      공주교육대학에서 일년 쯤 근무하다가 내가 공주사범대학으로 옮긴 것은 천구백칠십 년 오월이었다. 그 이전에도 사,오년간 시간강사로 나왔던 터라 그리 낯선 느낌은 주진 않았다.

      전임이 되어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는 『수요문학』동인들과의 자리였다. 최병두, 노동섭, 심규식, 조동길, 구중회 등 쟁쟁한 젊음들이 동나도록 공주의 막걸리를 퍼마시며 공주 좁은 골목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해박(?)한 이론의 싸움이 그칠 줄 몰랐고, 그 싸움의 불꽃으로 조금씩은 저린 가슴들을 태우곤 하였다. 후끈 달아오른 이런 열기 속에 그들의 후배로서 뛰어든 사람 가운데에 유병환, 엄기창 등이 있었다. 그들의 객기는 동인지, 시화전, 문학의 밤 등 쉬임없이 나타났으며 무슨 『허당집』인가 하는 이름의 괴짜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발바닥이 땅 위에서 몇 뼘은 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속에서 엄기창은 유난스럽게도 촌색시처럼 조용했고 수줍어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편이었으며 그리고 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 방(연구실)을 찾아와 마곡사 근처에 있는 가교리 고향마을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바람에 나도 촌 태생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의 이야기를 여러 시간 맞장구를 치면서 그야말로 열심히 들은 적이 있었다. 수태극으로 휘돌아 흐르는 냇물과 그 물 속에서 노는 가지가지 물고기 이야기, 무성산의 허물어진 성곽과 그 곁에 있는 샘물 그리고 거기에 얽힌 홍길동 전설, 화전신 이야기 등이었는데, 이번 시집의 원고를 통독하다 보니 그는 아직도 유년의 고향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느긋한 말씨와 부처님의 미소인 듯 따사로운 그의 소리 없는 웃음이 그의 사람됨과 문학의 성향을 모두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겸허한 순결성이라고나 할까? 노자가 일찍이 갈파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처럼 낮은 데서 표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엄기창이란 선생님이자 시인이다. 73년이던가 74년이던가, 엄기창은 『시문학』에서 주최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공모에서 당당히 당선되었으나 그런 것에 자만하지 않고 묵묵히 시작에 전념함으로써 일년 후(75년)문단 데뷔의 관문을 거쳤다. 요즈음 너도 나도 무슨 자격증을 얻듯이 추천입네 뭐네 하여 ‘문단’이라는 흙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나는 우리 문학의 건강을 위하여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 말은 엄기창이 이른바 소정의 절차를 밟아 문단이라는 데에 나갔으나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진지하고 겸허해진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의 문학』동인에서 핵심적인 위치로 활약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엄기창을 ‘조용하고 맑은 香’의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펴내는 이 시집에는 그런 향내가 은은히 스며 있다.


    * 시는 아무래도 응축이 그 바탕이다. 산문이 진술을 통하여 확산을 하는 장거리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시는 압축을 통하여 사물의 핵심을 전광석화로 드러내려는 최단거리의 장르라 이를 만하다. 산문에서는 할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비교적 마음 턱 놓고 차근차근 이야기할 수 있으나 시는 그럴 수가 없다. 직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상황에의 설명이 아니라 존재에의 부가이다. 모울튼이 시를 일러 산문의 토의문학과 대비하여 창조문학이라고 한 것은 소박한 대로 정곡을 찌른 견해이다. 지금은 덜 하지만 오래 전에 나는 시를 무슨 보석처럼 생각하였고 또 무슨 향수의 가장 진한 원료라고 여겼다. 흙의 정(精)으로서의 보석은 견고하고 빛나며 아름답다. 물의 정으로서의 향료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온 방안이 향내로 가득해진다. 둘 다 최대의 밀도로 농축되어 있다. 역시 시도 그래야 한다고 믿어 왔으며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언어의 경제원리를 철저히 지키는 것――다시 말하여 최소한의 언어를 선택하여 최대한의 감동과 충격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접은 시각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에 따라 어휘 하나, 토씨나 어미 하나, 쉼표 ․ 마침표 하나에 숨을 불어 넣으며 그것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상허가 그의 널리 알려진 『문장강화』의 앞머리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는데 존재의 환기 또는 그 번역으로서 ‘시’에 있어서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여러 날, 여러 달 또는 여러 해 고심 끝에 문자화 한 시를 거개의 독자는 신문기사를 읽듯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고 나서 무슨 수작을 하는지 모른다고 투덜댄다. 물론 작품에도 그 근본 원인이 있겠으나, 어느 면에서는 속도와 피부적 향락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독자에게 책임이 더 크다.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어느 작품의 경우나 마찬가지다.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

    내려올 곳이 너무 많아서

    내리지 않고

    北岳에서 南山으로 흐르며

    울기만 한다.

    대밭에 참새처럼 숨어

    지저귀는

    사람들은 알리라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룽 우르룽 울고 있는지….

    번갯불보다 고운 어둠 밑에서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다.


      그의 「서울의 천둥」의 전문이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특이할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조금도 격하지 않다. 차분한 가락과 상징을 통하여 할 말을 시로 드러내고 있다.

      서울 하늘에 ‘천둥’이 ‘늘’ 울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울 하늘에만 어떻게 일년내내 비가 오고 천둥이 치겠는가. 그렇다고 과장도 허구도 아니다. 다른 의미를 뒤에 거느린 암시와 상징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온갖 악의 온상일 수 있다. ‘항구’라는 언어의 의미군에 ‘숨어 있다’는 다른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고향의 시골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울’은 반 자연이며 반 고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리(天理)에 따른 한울님의 응징인 ‘천둥’이 항상 울기 마련이다. 내려와 인간들에게 응징할 곳이 ‘너무 많’으나 그냥 스스로 울 뿐, 가시적인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으로서의 ‘참새 떼’같은 인간들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하늘의 말 ―― 번갯불에 타면 그냥 없어지게 될 갖가지 욕망의 꿈을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다. 어둠이 번갯불보다 곱다는 시적 진술은 역설이다.

      시인 스스로의 내면을 향할 때에는 더욱더 응축의 정도가 심해진다. 그의 연작시「短歌」는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눈 위에 떨어진

    피 한 방울처럼

    너와 나는 남남이다.

    새벽부터 木鐸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다.

    宇宙를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고

    後光에 싸여 온 너의

    하얀 손

    그 하얀 손의 고갯짓

    四十九日 밤낮을 눈 안 붙이고

    나를 위해 木鐸만 두드리더니

    너는 하얗게 昇天하고

    아직 붉은

    나와, 너는 남남이다.

    ―― 「短歌 ․ 3」


      나와 너 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적 시상의 작품이다. 삶은 사실상 ‘너와 나’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너의 존재와 나의 욕망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고독의 숙명, 그것이 삶의 거짓 없는 모습일지 모른다. 이 시는 그러한 절망과 벽의 문제를 담담히 그러나 깊이 있게 드러내 주고 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곧 하얀 눈과 붉은 핏방울의 선명한 대비는 백설공주의 그것처럼 찬연히 아름답다. 그러나 하는 거부(흰색은 배제이니까)요, 차가움이며 다른 하나는 타오름(붉은 색은 불의 이미지를 지니므로)과 뜨거움으로서, 서로 단절되어 있는 상태다. 이것이 이 시인이 본 존재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讀解)의 결론은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벽 목탁 소리’를 배음(背音)으로 하되 그것은 ‘우주를 목도리처럼 목에 두른’ 하얀 손, 너의 나를 향(向)한 간절한 염원이다. 그러나 지상에 내린 눈이 곧 소멸하듯이 하얀 눈의 그 하얀 손은 사라지게 된다. 나는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리하여 ‘너’와 ‘나’는 영원히 ‘남’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러한 시적 요소들에 의하여 이 시는 진부함을 벗어나 그 나름의 빛을 얻는다.

      엄기창의 시를 눈여겨보면, 잠언풍이다. 짧은 서정시 같아도 그 속에서 그 나름으로 삶의 의미가 종교적으로 천착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엄기창이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의 하나이다.


    * 견고한 시 쳐놓고 건조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미지스트의 시들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명석하고 선명하지만 그런 만큼 깊이가 빤히 드러나 ‘울림’이 적다.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시 읽는 시법독해의 재미는 줄지언정 감동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랜슴 같은 이가 그런 유의 시를, 뿌리 없이 모래 위에 꽂아 놓은 시라고 빗대면서 ‘물질시’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럴듯하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있어서 상징주의적인 시보다는 투명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울림’은 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지 위주의 시는 울림을 통하여 스민다기 보다는 금속성으로 빛난다 할 것이다.

      엄기창의 시는 단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결코 드라이하지 않다. 봄비처럼 촉촉이 스미는 그 무엇이 있다. 그 자력(磁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바탕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시적 형상화의 성공이라고 생각된다. 대체로 문학은 말하기(telling)보다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 구체성으로 나타내야 하며 그것은 시에서 극치를 이룬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형상화 또는 육화(incarnation)라 부른다. 관념의 노출이 시가 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관념이 용해된 시적 ‘육체’를 얻을 때 공감대가 넓고도 깊어진다. 육화와 더불어 또 하나 지적할 일은 시의 서정성이다. 우무래도 시는 감성의 문학이며 직과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부분이다. 엄기창의 시는 잔잔한 서정을 예외 없이 배음처럼 깔도 있다. 거기에다가 시의 호흡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하나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바탕위에 그가 가진 시정신의 취향이 보여주는 친화력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자연 친화의 경향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보내는 태도는 고금 시인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특히 동양시의 전통이서 엄기창의 자연 친화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예찬이 아니고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계문명의 세계에 대한 거부와 농촌(고향) 붕괴에 대한 연민의 정을 포괄한다. 둘째로는, 미세한 것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벌레 한 마리, 새 한 마리, 들꽃 한 송이에 대해서도 그는 애정을 보낸다. 주로 그의 애정은 자연에 향해 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라 대체로 작고 힘없는 것들이다. 셋째로는, 삶의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쪽의 보이지 않는 데를 투시하여 의미를 드러내려는 예지가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시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때, 엄기창의 시는 시로서의 품격을 지닌다.

      이러한 여로 통로를 통하여 오는 엄기창의 시가 지닌 ‘스밈’의 친화력은 소중하다.


    [가] 溪谷으로 돌 돌

         연두빛 生命 굴리는 십자매 울음

         그 울음소리로도

         일어서지 않는

         산……

    ――「K화백 화실 풍경」


    [나] 굳게 입다문 산그늘 허물어진

         반달만한 양지에

         初産으로 낯 붉힌 진홍빛

         저 간절한

         말 한 마디

    ――「三月」의 한 연


    [다] 한 여자가 끊고 지나간

         길,

         눈발이 날린다.

         滿月처럼 둥근 배가 쫓아와서

         앞길을 막아서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절의

         끈 한 편에

         풀꽈리처럼 조그맣게 매달린

         내 금간 하루

    ――「끈」의 앞부분


    [라] 막차는 차갑게 식어

         어둠에 풀린다.

    ――「막차 안에서」첫 부분


    [마] 하나의 離別은

         별처럼 반짝이지만

         두 개의 離別, 세 개의 離別,

         수많은 이별들은 반짝이지 못한다.

    ――「短歌 ․ 5」첫 부분


      그의 시에는 신선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시 구절은 꽤 많다. 그 이미지들이 단순히 장식적인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의도하는 시상과 튼튼히 그러면서 기발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적 효과를 배가하고 있다.

      위의 인용은 극히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윗 시 중 [가]~[다]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연은 섬세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으며 그것은 단아한 호흡에 얹혀 독특한 시적 이미지로 전이된다. 특히 [가]와 [나]가 그러하다. 귀엽고 앙징스러운 십자매의 울음소리와, 봄이 되어 얼음 풀린 계곡의 물이 연두빛으로 오버랩 되면서 그것을 아직은 철이 이른지 그냥 묵중한 채 웅크리고 있는 산에 연결시키고 있다. 제명에 의거하건대 아마 어느 화가의 화실에 걸린 그림의 인상이 아닌가 싶다. [나]도 진달래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굳게 입 다문 산’ 그 그늘 ‘허물어진’ ‘반달’ 크기의 작은 양달에 피어 있되, 겨울 지나 피어 있는 그 어려움과 경이스러움이 여인의 초산과 같다고 말한다. 초산의 비유는 신선하면서도 적절하다. 어려움, 경탄, 생명에의 외경, 피, 핏덩이 탄생 등의 연상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간절한/말 한마디>는 초산의 긴장과 염원으로 충전된다.

      [다],[라]는 퍼스나의 고독이 자연 속에 용해되어 있는 예이다. ‘한 여자’가 단절시키고 떠나가 버린 길은 적막과 좌절의 그것이다. 그리하여 차가운 ‘눈발’이 사정없이 볼을 때린다. 하얗게 눈 덮인 벌판처럼 세상은 없음으로 꽉 차 공허할 따름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배는 아직 보름달처럼 둥글지만 그래도 역시 앞을 가로막는다. <은빛 반짝이는 단절>일 밖에 없다. 퍼스나의 고독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그맣게 풀 꽈리로 매달린 그 이미지가 단절의 처절성을 상당부분 완화시킴으로써 <금간 하루>정도로 머물게 해주고 있다.


    * ‘무던하다’는 말이 있다 엄기창에게 꼭 들어맞는 말로 여겨진다. 고등학교 시절의 『팔각정』동인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의 24~26년간 시에 열정을 쏟은 셈이며, 많은 재능들을 물리치고 문단이라는 데에 첫 선을 보인 지도 거의 20년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안달복달하면서 시집 간행과 발표에 눈독을 드릴 테인데, 그냥 묵묵히 누구를 부러워 할 것도 없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시만 다듬다가 이제 멱이 찼다고 느꼈는지 그동안 발표한 것들을 정리하여 한 권으로 묶게 되었다. 오늘날 문학 공해의 시대에 나는 그런 엄기창의 겸허와 진지성에 대하여 신뢰감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고전적인 시작 태도에 관해서도 긍정적이다. 모던이니, 포스트모던이니 해도 역시 시의 올바른 길은 엄격한 언어의 절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의 적절한 절제에서 압축성을 갖게 되며 그 압축에서 리듬이 태어나고 그 리듬은 힘이 되어 우리를 울린다. 어떤 평자가 정지용의 시를 언급하면서 정곡을 찌른 말처럼, 언어의 절제는 욕구의 억제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턱없는 미지에의 동경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절제 잃은 언어의 분류로 나타난다면, 고전적인 엄격한 자아의 통제는 자연히 언어의 절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엄기창이 보여 주는 언어의 절제도 실은 그가 가진 세계관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 엄기창 문학의 한계가 있으며 극복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엄기창의 시는 예외 없이 짧다. 서정적이며 아름답고 또 거부감 없이 잘 스며들지만 작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서정의 소품이 그의 시가 지닌 대체적인 인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작다>는 사실은 다양성의 결여와도 연루되어 있다. 소재의 선택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 두루 마찬가지다.

      시인은 늘 틀을 깨부수는 자이며, 새것을 찾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열정이 늘 따라야 된다. 삶의 문제에 관하여 세계에 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이 무엇인가, 선이 무엇인가, 미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추구해야 한다. 시인이 불안해 보이고, 불온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랜만에 그동안 써온 시편들을 일단 정리하면서 이 시인에게 나는 답답할 정도로 꼼꼼한 ‘시학’으로서의 모범적인 시 쓰기의 구속에서 좀 벗어나는 그런 용기를 갖도록 주문한다. 튼튼한 엄기창의 시학을 토양으로 하여 변모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1. 작품에 대한 평설 리스트

      가. 조재훈,   절제와 스밈의 시학,        시집 ‘서울의 천둥’,      1993년

      나. 이헌석,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   시집‘가슴에 묻은 이름’   2004년


    2. 약력

    1952년 충남 공주 출생

    호는 淸羅 또는 杏軒

    1970년 공주 영명고등학교 졸업

    1974년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1974년 월간 <시문학>사 주최 제 1회 전국대학생 백일장 장원

    1975년 월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

    1993년 첫 시집 「서울의 천둥」 출간

    2004년 제2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출간

    2004년 「호승시문학상」수상

    2005년 <문학사랑> 인터넷 문학상 수상

    오늘의 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한국 문인협회 대전지회 시분과 이사

    현재 (사)문학사랑협의회 의장

    현재 유성고등학교 교사

  •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 -― 엄기창 시인의 시세계

     

    ▪해설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

    ― 엄기창 시인의 시세계




    리 헌 석

    (시인, 문학평론가, 대전문인협회 회장)



    1.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어릴 때 떠내려간/ 태화산 그림자를 건지려고/ 서해 바다에 갔었네>(「세월」일부)라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1951년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그곳에는 태화산이 있고, 그 자락에서 곱고 맑은 향토적 서정을 익힌다.

    그는 세월을 거슬러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풀꽃’을 그리워한다. 맨발에 신겨 주던 ‘꽃신’과 날려보낸 연(鳶)의 추억이 아직도 ‘그림자’로 가슴에 남아 있다. 아련하게 그리운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에 머물려고 몸을 추슬러 보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초승달’이 오히려 그리움의 정서를 일깨운다.


    번지 없이 띄워 보낸

    내 풀꽃은

    흔적이 없고


    맨발 위에 신겨준

    꽃신만 한 짝

    파란 하늘 보고 돌아누워 있었네.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연(鳶)처럼

    영원히 잃어버린 내 그림자여,


    물빛 흔들어 몸을 감추고

    닫아 거는 가슴엔

    날선 초승달 하나.

    ―「세월」 일부


    산촌에서 소년기를 지난 그는 중소도시 ‘공주’로 유학을 한다. 그 곳에서 그는 학업에 정진함과 동시에 문학의 꿈을 가꾸게 된다.

    공주영명고등학교 재학 시절 ‘팔각정문학회’의 일원으로 문학 청소년기를 보낸다. 당시 대학에 재학 중인 윤석산 시인이 자주 찾아와 문학혼을 일깨우고, 유병학 시인은 국어 지도교사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선배인 문희봉, 김영훈, 전영관 등으로부터 문학 창작의 열기를 이어받는다. 필자는 그와 동기동창이면서 같은 서클 동인으로, 문학의 꽃을 함께 가꾼 지기지우(知己之友)였는데, 80년대에 다시 만나 문인의 길을 같이 가고 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한다. 당시 공주사대에는 ‘수요문학회’가 치열하게 활동할 때여서, 그의 문학혼은 일찍 개화하게 된다. 임헌도 조재훈 한상각 시인을 교수로 만나고, 선배인 임강빈 임성숙 최원규 김명배 등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명수 구중회 윤강원 등의 선배 동인을 만난다. 당시 수요문학회는 작품 합평회를 통해 작품 수준을 높이고자 절차탁마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수련을 거쳐 그는 재학 중인 1974년에 《시문학》 주최 제1회 전국 대학생 시 공모에서 당선하여 1회 추천의 대우를 받는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군 복무 중인 1975년에 완료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는 중등학교 청년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의 삽질을 쉬지 않는다. 1980년대에는 ‘오늘의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예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1993년에 첫 시집 『서울의 천둥』을 발간한다. 향토적 서정이 넘치는 작품 성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제목의 시집이지만, 이 시집에는 엄기창 시인의 결 고운 서정이 가득하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현(絃)을 베고 누운 음(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음(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음(音)들로 구상(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서곡(序曲)」 전문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노래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그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인지, 혹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인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스스로 노래에 일가견을 가진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현을 통해 생성된 소리들이 그의 목젖을 통해 노래로 거듭난다는 표현에 이르면, 그는 노래를 듣는 수준에서 주체가 되어 부르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노래는 ‘새’의 노래와 동일시되고 있다. 즉 새의 울음소리로 상징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음들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 여기에서 노래라고 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정형화된 예술 행위로 수용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를 읊거나 짓는 행위 또한 ‘노래한다’고 하는 점에 이르면, 그의 노래는 시 창작 행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어떻든 그는 고운 서정과 맑은 향기가 넘치는 작품을 빚고 있다. 그러한 작품이 최근에는 우리 고유의 정가(正歌)인 ‘시조’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에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연륜을 가늠하게 한다. 다작(多作)과 과작(寡作)을 뛰어넘어, 쉬지 않고 창작에 전념하여, 둘째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2. 금강의 여울소리를 찾아


    <그대 속삭임 들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돋움하는/ 키 큰 나무가 되고 싶다.>(「금강」일부)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금강을 주제로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에 있는 무성산․태화산․철성산에서 흘러내린 태화천 계곡의 물은 구불구불 흘러서 유구천에 이른다. 다시 이 냇물은 산 그림자와 들녘의 바람을 데리고 금강에 이르는데, 바로 이 지점이 금강의 디디울나루 아랫녘이다. 디디울나루는 금강의 여울과 유구천의 여울이 만나서 이룬 ‘덧여울’이었는데,  ‘더뎌울’ ‘데디울’ ‘디디울’로 변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는 금강의 상류에서부터  ‘곰나루’(디디울나루의 약간 상류)에 이르기까지를 맑은 서정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어서 그의 시혼(詩魂)은 금강의 하류인 황산나루나 백제의 역사가 잠겨 있는 부여의 백마강을 거쳐 서해 바다에 이르러 결곡한 서정을 형성하기도 한다.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

    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금강」 일부


    그는 또 다른 작품 「금강」에서 <하늘의 맑은 마음 한 자락/ 내려와 손을 씻는 비단가람>이라고 노래한다. 그의 의식 속에는 세세한 추억과 삶의 양상이 금강과 맞닿아 있다. <어릴 때 잃어버린 내 따오기 소리>도 금강에서 찾아내고, 상류에 있는 무주구천동의 물소리처럼 반짝이는 여울도 찾아낸다. 또한 그는 <오래 보지 않아도/ 그 노래 그 물빛 마음에 젖어/ 눈감으면 나직이 우는 가람>과 함께 살아간다.

    금강은 나직하게 울면서 아름다운 산 그림자를 싣고 내려간다. 「산수도(山水圖)」에서 그는 개나리꽃에 불을 붙이는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기도 하고, 시인 스스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온갖 골물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는 낚시를 하는 노옹(老翁)에 시선을 멈춘다. 그 노옹의 낚시 끝에 걸린 ‘청청한 산그림자’를 발견하는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낚시터에서」라는 작품을 통해 <빈 바구니에/ 달빛만 가득 채워도/ 세상을 늘 사랑할 수 있다.>고 노래하여 동양적 세계관, 즉 허정(虛靜)의 시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허정의 시심은 자연을 관조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직접 노래하지 않고, 제3자적 관찰자 입장을 취하기도 하는데, 비유적 감각이 눈부시다.


    하얀 돛단배가

    아침의 건반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파도에 몸을 던지고

    잊었던 리듬을 생각하는 갈매기,

    쾌적한 바람이 햇살 층층을 탄주한다.

    미역 숲에서 멸치 떼들이

    오선의 층계를 올라간다.

    갈매기 노란 부리가

    번득이는 가락을 줍고 있다.


    밤내 뒤척이던

    허전한 어둠의 꿈밭

    소라껍질이 휘파람 불며

    모래알 손뼉을 쳐 뿌리고 있다.

    얼비친 하늘의 푸른 물살을 타는

    갈매기 눈알에

    잊었던 리듬이 내려앉는다.

    하늘 속의 빛이랑이 내려앉는다.

    ―「아침 바다」 전문


    어찌 보면 단순한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난해한 것 같기도 한 이 작품은 바다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아침 바다에 하얀 돛단배가 지나가고, 갈매기가 먹이 사냥을 한다. 이미 생명을 잃은 소라껍질은 모래알이 묻은 상태로 해변에 버려져 있는데,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갈매기는 바다와 하늘을 유영한다. 이런 서경을 독자적인 시어와 문학적 감수성으로 빚어낸 절창이라 하겠다.

    그는 강에 대한 사랑도 특별하지만,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바다에 대한 노래도 곡진하다. 「어촌」에서 그는 <물비늘 번득이는 바다의 자유>, 까치집처럼 열려 있는 아낙들의 빈 가슴, <돛대 끝이 휘저어 놓는 하늘>, 투시의 눈을 반짝이는 하얀 갈매기, 바다의 노래를 실러 떠나는 바다의 노래, 등의 특별한 형상화를 보인다.

    또한 「후리」를 통해 <달빛 아래 퍼덕이는 절망의 바다>를 찾아내기도 하고, 「섬」에서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를 찾아내기도 한다. 「제주해협」에서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을 통해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을 찾아 <무릉도원>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듯이 물의 이미지에 특별한 자질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태화천의 맑은 물소리에 연유하는 것 같다.



    3. 눈물 빛 사친가(思親歌)에 같이 울며


    <상여 뒤 따르며 울 때는/ 솔방울마다 요령 소리로 울어/ 하늘이 무너지더니/ 남같이 낯설어진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아버님 무덤>(「성묘(省墓)」 일부)에 머리 숙여 눈물 흘리는 엄기창 시인은 절절한 슬픔을 예술적 서정으로 승화시킨다.

    <저승은 늘 춥고 바람 불 텐데/ 제 염려 거두시>라고 말씀드리며 절을 해 보지만, 생전의 아버지 음성이 들려 오는 것만 같다. 머리 위 상현달은 바로 아버지의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별세하신 육친에 대한 그리움은 시인의 의식을 사물의 테두리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온갖 사물들이 육친과 연결되고, 그 범주에서 연상의 구체화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엄기창 시인은 격정적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격조를 지킨다. 그 서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고,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를 형성한다.


    아버님 목소리 땅에 묻던 날

    대밭에서는

    하루종일 대순이 돋았습니다.

    한 줄금 내린 소나기로

    목타던 대지가 젖어

    취나물 향기 이내처럼 번지고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며

    개나리꽃 빈 가지에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착하게 사신 생애 기름으로 태워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셨나,

    철성산 풀빛 짙어오는

    풀빛 속에나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태화천

    물소리 속에

    아버님 모습을 늘 뵙니다.

    ―「아버님 전 상서」 전문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는 봄날에 그는 선친께 편지를 쓴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신 아버지를 그린다. 이 작품은 후에 시조로 거듭나기도 한다.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무덤가에// 눈시울 적시며/ 절하고 돌아서면// 내딛는 발자국마다/ 밝혀주는 초승달>(「성묘」 전문)이라고 사친(思親)의 절절함을 노래한다. 이 시조는 앞에서 예를 든 서정시의 다양한 표현 요소 중에서 핵심 요소만 추출하여 형상화한 작품이어서 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애절한 사친가(思親歌)는 사모10제(思母十題)를 비롯한 사모의 정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다. 어머니가 별세한 때부터 열 가지 과정을 통해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 바로 ‘사모 10제’인 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어머니에 대한 작품들을 통해 눈물 어린 사모곡(思母曲)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안수」에서 <찢어진 문틈으로 보던 어머님의 합장한 손> <살포시 지은 미소에 성스러운 그 눈빛> <정안수 대접에 담긴 어머님의 큰사랑> 등은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담아낸다.

    둘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가슴에 묻은 이름」에서 그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도 꺼지지 않으려고/ 날개 파닥이는 등불을 보며/ 어머니의 생애를 접어/ 가슴에 묻는>다고 노래한다. 현실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산에 묻지만, 사실은 그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엄기창 시인 역시 선자(先慈)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어머님 이름이 지워지자

    고향 빛깔은

    막막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임종(臨終)」(思母十題 1) 일부


    오르막길 오를 때마다 상여는 멈춰 서고

    상주들은 너도나도 돈을 거는데

    어머님은 빈 손 맨발로 떠나

    저승의 어느 주막에서 울고 있을까.

    ―「운상(運喪)」(思母十題 2) 일부


    사잣밥상 아래

    백목련 꽃 두어 이파리

    어머님이 벗어 던진 이승의 신발

    ―「고무신」(思母十題 3) 일부


    자식 둘 앞서 보낸 눈물의 생애를 묻고

    맨발로 헤쳐 온 아픈 역사를 묻고

    어머니의 향기를 묻는다.

    ―「하관(下官)」(思母十題 4) 일부


    생전에 못 사드린 과일로

    제사상을 채우며

    이제는 장식에 지나지 않음에 가슴 아파합니다.

    ―「사십구재(四十九齋)」(思母十題 5) 일부


    부모를 여읜 자녀라면 누구나 체험했을 가슴 아픈 노래이면서, 엄기창 시인의 진실 어린 고백이기도 하다. 누구나 이러한 애절함을 느꼈을 터이지만, 그 애통함을 그냥 가슴에 묻어둔 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노래한 이 작품들은 애상적 정서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픈 노래를 계속한다. <어머님 아린 가슴에/ 뽑혀지지 않는 대못>(돌무덤), <산천에 봄이 왔지만/ 내 가슴은 겨울입니다>(기다림), <어둠을 환히 태우고도 남을/ 시퍼렇게 날 선 눈물을 보았습니다.>(눈물), <살아생전 마음 한 번/ 편하게 못해 드린/ 내 마음의 빛깔은/ 잿빛 후회입니다>(어머니), <어머님 눈동자에 맑게 고인 하늘로/ 하얀 구름 되어 떠나셨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흑백사진 속에서/ 어머님의 나이는/ 언제나 서른입니다>(흑백사진) 등 그의 사모곡은 그칠 줄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아내가 채운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사랑이 가득 담긴 축시(祝詩)를 빚는다. <생활의 아픈 멍울 가슴으로 싸 안으며/ 얼굴엔 항시 햇살 같은 웃음으로 어둠을 밝혀/ 바라보면 고향같이 편안한/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일곱 살 철부지>가 된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아내로부터 모성을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속에 묻어 둔 사랑의 촛불>을 밝혀 아내에게 씌워진 <생활의 짐>을 벗기고자 한다.

    이렇듯이 그는 사랑 안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어린 소년과 같다. 지천명(知天命)의 연치(年齒)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년과 같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다.



    4. 생명의 원천을 지키기 위해서


    <강물은 그저/ 헐떡이고만 있었다.// 키 큰 미루나무 가지 사이/ 거미줄 속엔/ 강물의 핏빛 울음만 걸려 있었다//…// 검게 썩은 물빛 문둥이처럼/ 강의 신음소리>(「강변 야영」일부)가 밤새 시인의 꿈 밭으로 흘러든다고 노래하는 엄기창 시인은 자연 환경의 중요성을 작품으로 환기시킨다.

    오염된 강에서 시인은 환경 파괴의 무서움을 토로한다. 「갑천 붕어」는 아파트 그림자를 산 그림자로 알고 올라온다. 그러나 상류로 오를수록 <검은 폐수만 흘러내려/ 앞길은 깜깜하게 막혀> 있다. 그래서 <붕어의 눈물 속에서/ 납물>이 흐를 정도로 오염된 상황을 만난다. <등뼈 굽은 새끼를 안 낳으려고/ 붕어는 자갈밭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고 노래한 부분에서 그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엿보게 된다.

    강물만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소나무」에서도 <찢어진 살갗에서/ 중금속 피가 흘렀다>고 고발한다. 그런 소나무를 보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멀어지는 산의 마음>을 찾아내며 시인은 절망한다. 특히 일급 자연으로 유명한 지역, 수려한 산촌의 대명사로 알려진 ‘청양’마저 오염되었다는 데에 이르면 삶의 위태로움을 예견하게 한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개구리 울음 하나 지나갔다.


    별똥별처럼

    타버리고 다시는 반짝이지 않았다.


    칠갑산 큰 어둠은

    돌 틈마다 풀꽃으로

    개구리 울음을 품고 있지만


    기침 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

    가슴을 닫았다.


    차창을 더 크게 열어봤지만

    청양을 다 지나도록 청양 개구리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청양 개구리」 전문


    환경 오염에 의한 개구리의 감소를 밝히는 것인지, 혹은 무차별 개구리를 포획하여 보신하는 세태를 고발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의 부재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의 중심 제재는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는 <청양 개구리>라 할 때, 자연 파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는 노래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실망은 인간 삶의 양식으로 전이된다. 우리 나라 도시의 표상인 서울에 대해 시인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서울의 천둥」에서 그는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고 진술한다.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우르릉 울고 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부정적 시각을 표출한다. 서울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지만, 그의 시심은 절망적 색채에 싸인다. 이러한 절망은 꼭 ‘서울’이라는 특수 지명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넘치는 ‘도시’의 일반화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여 거듭나고자 한다. 극복의 매체로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주문한다.


    꽃도

    꽃의 마음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황홀한 몸짓의 장막 뒤엔

    말라 시들은 노래도 있겠지


    꽃잎을 먹고사는 어둠의 벌레들이

    고랑처럼 파 놓은

    상처들도 있겠지.


    날 선 눈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아름다운 눈으로 보아야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 보기」 전문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성싶다.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더럽고 부정적인 사물까지 아름답게 노래한다면, 그것은 진실의 은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둔 현실에서도 아름다운 시심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 같다. 「빈 접시」에서 그는 <내가 꽂아 주는 억새꽃으로/ 오늘밤 네 고향 산에/ 칠색 영롱한 무지개를 걸>라고 청하기도 한다. 「달맞이꽃」에서는 자녀들에게 <올해는 헐벗은 가슴에/ 전설 같은/ 이 애비의 어릴 적 보름달을 안>으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세상을 지탱하는 벼릿줄이고, 순수를 지킬 수 있는 대안(代案)임을 노래하여 맑은 시심을 견지하고 있다.



    5. 연화교에서 부는 바람처럼


    <잠 못 드는 노승의/ 천수경에 달은 지고// 불심은 태화천에 녹아/ 사바세계로 흐른다>(「마곡사」 일부)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어릴 때부터 불교적 환경에서 자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작품에는 불교적 시심이 짙게 깔려 있다. ‘마곡사’는 그의 고향 마을에 있는 천년 고찰(古刹)로 조계종의 본사 중의 하나인데,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여러 분 배출되어 유명한 절이다.

    큰 절이 대부분 그렇듯이 마곡사에도 연화교와 오층석탑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연화교 건너서면/ 솔바람 풍경소리// 향내 서린 잎새마다/ 불경 소리 담겨 있고// 법계를 지키고 서서/ 침묵하는 오층석탑>을 노래한다. 불심이 태화천에 녹아 흐른다거나, 나무 잎새마다 불경 소리가 담겨 있다는 관점은 바로 온갖 사물에 불심(佛心)이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해당한다. 또한 사물과 불성(佛性)을 하나로 보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목탁소리 눈을 뜨면


    안개 낀 다리를 건너

    손짓하는 사바의 마을

    ―「연화교에서」 전문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1연(시조의 초장)이라 하겠다.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는 시각은 대상과 본질의 역설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시냇물이 흘러가고, 나는 다리에 서 있는데, 다리에 서서 바라보면 그와 달리 착시(錯視) 현상에 빠지게 된다. 시인은 이런 현상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밝힌다. 즉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선어(禪語)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한다.

    이런 시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매일 아침 되씹는 절망을 접으며/ 오늘도 나는 웃는 연습>(비온 날 아침)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또한 <더운 피 온 몸을 태워/ 어둔 세상 밝>(해돋이)히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에 이른다.


    향일암 석등(石燈) 안

    찰람찰람 고인 고요를

    새벽달이 갸웃이 훔쳐보고 있다.


    파도 소리에 씻겨진

    동백꽃 봉오리마다

    세상 밝히는 꽃불을 켜면


    먼 수평선 일어서는 눈부신 평화(平和)

    관음상 입가에 살포시

    미소로 번진다.

    ―「향일암 일출」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며, 엄기창 시인은 눈부신 평화를 위하여, 늘 관음상 입가에 번지는 미소처럼 맑은 마음을 지향할 것 같다. 그리하여 어둔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자리할 것 같다. 이제까지 고운 서정과 맑은 향기가 넘치는 작품을 창작하였듯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본다. 이런 기대와 믿음으로 그의 작품 기행(紀行)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