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제7시집

  • 혼자 사는 친구에게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등 기대고 부대끼며 살다가

    나들이 끝내고 돌아가는 것

    손 흔드는 뒷모습 허전하지 않게

    씨앗 몇 알갱이 떨어뜨리고

    큰 나무로 자라게 거름이나 주면서

    싸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

    아이들 많은 집안은 가난해도 부자이다

    자식들 꿈들은 모두 다 내 재산이다

    허공 높이 소망을 연처럼 띄워놓고

    하늘까지 오르도록 줄 함께 잡고 버티다 보니

    이제 나는 알겠다

    기르는 게 두려워 외롭게 사는 것보다

    날마다 전쟁이라도

    웃을 일 풍성한 게 행복이라는 걸

     

  • 하일夏日 점묘點描

    하일夏日 점묘點描

     

     

    매미소리 한 줄금

    골목을 쓸고 간 후

    배롱나무 가지에 타오르는

    늦더위 송이송이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마을회관 공터에는

    고추잠자리만 하루 종일 맴돌다 간다

    소 울음 닭소리도 잦아든 지 오래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씩

    사립문 닫히는 마을

    봉숭아꽃 몇 번을 피었다 져도

    금줄 걸린 집 하나 찾을 수 없고

    접동새 흐느낌만

    어둠처럼 내리고 있다

     

     

  •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친구들 더러는 여의도에 가고

    모두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신문마다 이름들 반짝반짝 빛나는 저녁

     혼자 앉아 김치 안주로

    소주 몇 잔 꺾고 돌아앉는 어둠에

    푸념처럼 슬그머니 떠오르는

    벼린 초승달

    무엇을 이루려고 젊은 날을 불살랐는지

    권력놀음에 취해

    서로에게 총질하는 서글픈 창문 너머로

    삭막해진 산하를

    그래도 촉촉하게 붙잡아주는 개구리 소리

  • 천 년의 울음

    천 년의 울음

     

     

    백제의 노을 새 옷처럼 걸치고

    낙화암에 서서

    강물의 흐름에 녹아있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보면

     

    어떤 슬픔은 천 년을 가는 것도 있다

    해가 갈수록 이끼처럼

    푸르러지는 것도 있다

     

    와당에 새겨진 눈부신 웃음에도

    눈물은 숙성되어 짠해지고 있었다

     

    고란사 종소리가 백마강에 윤슬로 반짝일 때면

    잔잔하던 가슴의 깊은 어디쯤에선가

    용암처럼 뭉클뭉클 솟아나는 인연의 울림

     

    , 나는 피에서 피로

    천 년의 울음을 물려받은

    백제의 후손

     

    부소산 그늘에 기대어 한참을 흐느끼다가

    그 날의 함성을 떠올려 보니

     

    궁녀들 울음도 천 년을 살아

    낙화암 진달래는

    핏빛으로 붉더라

     

    슬픔 밴 백마강은 쉬지 않고 울더라

     

     

  •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오월 산은 빛나는 에메랄드

    꾀꼬리 노래가

    송이송이 금계국 잎 사이에 꽃을 매달면

    신바람 난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머스캣 한 줌씩 나누어준다

    아내의 시계는 일곱 살로 돌아갔다

    무의식 속에서도 빼앗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즐기는 아내

    아내의 세상은 장밋빛인데

    함께 걸어가는

    나의 세상은 먹오디 빛이다

     

     

     

  • 남산 뻐꾸기

    남산 뻐꾸기

     

     

    남도에서 온 사람도 북도에서

    온 사람도

    뻐꾸기 노랫소리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울이 온통 고향 산처럼

    초록 물드는 오월이 오면

    남산 뻐꾸기 짝을 부르듯

    고향 사투리로 노래를 한다

     

    봉수대에서 한 나절 초록을 품고있다가

    팔각정으로 와서

    도시의 소음들을 말갛게 씻어놓는다

     

    남산 뻐꾸기 목소리

    골목마다 구성지게 흘러넘치면

    서울 사람들 모두 편안해진다

     

    한 고향 사람처럼 어깨동무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이웃이 된다

  • 목줄

    목줄

     

     

    아내가 목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다

    파란 힘줄이 앙버틴 양 다리에서 소름처럼 돋아난다

    눈 감고 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동행하는 나의 목에도 줄이 매어져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목엔 모두 굴레가 채워져 있다

    인생이 개처럼 인연의 목줄에 꿰여

    덧없이 끌려가는 운명이라 해도

    가장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고 웃으면서 살아가자

    지금은 혼자 다독이는 슬픔에 절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삶이라 해도

    잘 말린 구절초 꽃잎처럼

    우릴수록 향이 깊어지는 그런 사림이 되자

    올무에 옭힌 세상은 온통 눈밭이지만

    나 혼자만 매화로 피어날 수는 없다

     

  • 첫눈

    첫눈

     

     

    바람 편에 배달된

    아내의 걱정

     

    이 먼 들녘까지 따라왔구나

     

    정겨운 잔소리처럼 팔랑대는

    기차의 창문 너머로

     

    평생을 몰래 숙성시킨

    속말을 보낸다

     

    아내여

    멀리 보내놓고

    두근거리는 가슴처럼 날리는 눈은

     

    다음 또 다음 생애에서도

    천 년을 함께하고픈

    내 마음이다

     

  • 낮달

    낮달

     

     

    새 신을 사시고도

    어머닌 오래도록 헌 신을 기워 신으셨다

     

    찢어진 데가 또 찢어져 발가락이 나와도

    시렁 위에 모셔둔 신발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저 건너로 가시고 난 후

     

    너희들이나 신으라고 어머니 벗어놓고 간

    하얀 고무신 한 짝

     

    어머니

    저승의 주막집까지 

    맨발로 절뚝이며 가셨는가요

     

    오늘도 끼니 거르신

    창백한 얼굴이 가을 하늘에 슬프다

  • 두 석상의 하나 되기

    두 석상의 하나 되기

     

     

    통일 전망대 내리는 비엔 소금기가 배어있다

    갈 수 없는 마을이 그리워 울다 떠난 사람들의 눈물과

    높새바람에 펄럭이던 수많은 소망들이

    포말처럼 부서져서 해당화로 피는 곳

    남해에서 달려온 꽃바람이 철조망에 막혀

    한숨으로 시드는  곳

    겨울만 사는 동네는 봄이 와도 쪽문을 열지 않는다

    산 하나 넘으면 저기가 고향인데

    나의 그리움은 늘 우연雨煙에 가로막힌다

    두고 온 어머니의 따뜻한 웃음과 고향 마을의

    학 울음소리

    나의 어린 시절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봄이면 제비처럼 찾아와 울던 고향이 함흥이라는

    그 할아버지

    발걸음 뚝 끊긴지 오래인데

    아직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닿지 못하였는가

    미륵불 성모 마리아 두 석상의 기도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소망처럼 끝까지 매달렸던

    마지막 잎새 툭 하고 떨어지고

    국토는 아직도 굳게 동여맨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