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서정 수필

  • 말의 묘미

    말의 묘미

    淸羅 嚴基昌
     벚꽃이 만개한 일요일. 친구하고 ‘청남대’ 구경을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기에 차를 몰고 친구의 집으로 향하였다. 봄날은 화창한데 기다리다가 차에 오르는 친구의 얼굴은 겨울처럼 흐리다.

      “이 사람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냉전 중인데 힘이 드는구먼.”

      “누구하고? 제수씨하고? 이 사람아 살아가며 부부끼리 냉전 한 번 안 해본 사람  이 있는가. 자네가 좀 양보하지.”

      “집사람 하고라면야 걱정도 않지. 며늘아이 하고 그러는데 참 불편하구만. 내보내야겠어.”

      그러고 보니 지난 3월 친구의 자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들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손자, 손녀를 보았을 때를 대비해서 집안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며느리 성격이 싹싹하다고 무던하다고 지난번에 자랑하지 않았나? 그런 며느리 하고 왜?”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느리가 화낼 만도 하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 저녁이라도 자기가 차려드린다고 일찍 퇴근하여 저녁상을 올렸더니, 국이 좀 짰던지

      “소금이 넘쳐나는 모양이구나. 네 집은 음식을 이렇게 짜게 먹냐?”

      정통으로 며느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거였다. 웬만하면 참는 이해심 많은 여자도 친정의 흉을 보면 골내는 것을 몰랐던가? 예순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여자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다니!

      판암동에서 추동 쪽으로 접어들자 길 가에 벚꽃이 무르녹았다. 벚꽃뿐만 아니라 진달래, 목련, 배꽃들도 저마다 자태를 자랑하며 산하를 온통 꽃으로 덮어버렸다. 대청호의 푸른 물과 조화를 이룬 절경을 감상하며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는가? 우리 선인들은 그럴 때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겠는가?”

      나는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옛날 어떤 며느리가 시집 온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시아버지 진짓상을 보아다 놓았다네. 시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대견하였겠는가. 자애로운 눈으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데, 첫 숟갈에 ‘딱’ 하고 돌멩이를 깨물었다네. ‘얘, 아가!’ 불안해 죽겠는데 부르시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간신히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로, ‘네……?’ 하였더니. 시아버지 한다는 소리가, ‘이 다음에는 식성대로 섞어 먹게 따로따로 놓아라.’ 이렇게 말했다네. 위축된 상태의 며느리를 감싸면서도, 앞으로는 돌멩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이렇게 따뜻하게 할 수는 없는가? ”

      “……….”

      “자네 말한 대로라면, ‘너희 집은 쌀이 부족해서 쌀 반 돌 반 섞어먹니?’하고 말하지 않았겠나. 집에 가는대로 시아버지 자존심 어쩌고 하지 말고 사과하게.”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기 속 며느리는 죄송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으로 가면서 쿡쿡거리며 웃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시아버지를 더욱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참으로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듣기 거북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 말을 잘못해서 부부간에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상사에게 미움을 받아 직장을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말을 보내면,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 건너온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전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말, 이것이 정말로 묘미 있는 말이 아닐까?    

  • 정화수

    정화수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전으로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문틈으로 열여드레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으스름 달빛은 온 세상에 넘실거리고, 검게 가라앉은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꼍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산 밑 장독대 앞에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를 만큼 어머니는 기도에 몰두하고 계셨다. 하얀 사발 안에 우물에서 갓 길어낸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어머님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꼭 감긴 두 눈가엔 간절한 염원처럼 맑은 달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아들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들만은 그 어렵다는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빌고 계실 터였다. 온 새벽의 경건함이 새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님 등 뒤에 둘러져 있고, 찬란한 달빛은 모두 어머님의 두 손끝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온몸이 달빛을 받아 후광에 싸여 있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오신 어머님이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나를 낳고는 겨우 웃음을 찾으시었고, 내가 등창만 앓아도 아버지 밥상에도 놓기 어려운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남가섭암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시던 어머님이다.

      나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감동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바라보았다. 잘못 움직이면 어머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깨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살금살금 방으로 뒤돌아올 때도 달빛 아래 그림처럼 그렇게 앉아 계셨다.


    한밭수필9(2017)

      

  • 죽음의 의미

    죽음의 의미

    淸羅 嚴基昌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연탄가스로 죽었다. 한여름내 등 밑을 적셔왔던 습기를 없앤다고 연탄을 피워놓고 잠든 사이에 죽음의 신은 그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끌고 가 버렸다. 팔팔 뛰던 사람이 밤사이에 웃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도 못하고, 나를 보아도 반갑다 말 한 마디 못하는 한 덩어리 굳은 물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 동안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 보리밥

     

    보리밥

    淸羅 嚴基昌
     집 근처에 보리밥을 잘 하는 식당이 새로 생겼다기에 모처럼 외식을 시켜준다고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아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별미로 먹는 보리밥 외식에 대체로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모처럼의 외식에 큰 기대를 가지고 따라 온 아이들은 불평이 대단하였다.

     “아빠, 왜 이렇게 꺼끌꺼끌해? 이것도 먹는 음식 맞아요?”

     “미끌미끌해서 안 씹어지고 입 속으로 막 돌아다니네. 라면 끓여 먹는 게 훨씬  낫겠다.”

     햄이나 소시지, 라면 등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에게 보리밥은 낯설고 거칠어 전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가난하였었다. 겨울이 지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은 모두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오월을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하지 않았던가. 누렇게 부황난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던 이 시절엔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뿡뿡 기운차게 방귀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점심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밥 차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엌을 기웃거려 보니 시렁에 보리쌀을 삶아 밥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 있었다. 식구들 저녁거리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시장한 판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배가 불끈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겁이 났다. 일에 지쳐서 돌아와 부족한 저녁밥에 눈을 부라리실 부모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일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쯤 되어 나는 겁에 질려 뒷논에 쌓아 놓은 짚더미에 몸을 숨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 걱정에 온 마을을 헤맨 부모님이 짚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못 견디게 그리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보리밥을 먹어가며 아이들에게 그 보리밥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마치 옛 이야기나 전설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들 자신조파 풍요에 취해 어려웠던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데, 그 시절 그 가난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과연 실감이 나는 이야길까?

     요즈음 아이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서만은 그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만큼 가슴 시린 그리운 이야기 거리는 그 때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 해우실

    해우실(解憂室)

    淸羅 嚴基昌
     D 사 입구에 해우실(解憂室)이 있다. 근심이 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록빛 녹음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하게 서 있는 이 기와집에 호기심을 품고 들어서면 지린내가 코를 진동한다. 뒷간을 화장실이라 부르다 못해 이젠 해우실(解憂室) 이라고? 미화(美化)도 이만하면 극치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면 찡그린 얼굴로 황황히 들어섰던 사람들이 얼굴을 활짝 편 모습으로 느긋하게 나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이 자비로 중생을 제도하듯이 계곡 냇가에 세워진 이 작은 집 한 채가 등산객들의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고픔을 참는 고통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뱃속의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엔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설악산과 동해 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강릉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내 성격에 선생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다음 정차하는 곳까지 참기로 하였다.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자갈길에서 차가 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빙빙 돌아 처음 보는 동해의 장관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께 발견되어 울진이든가 영덕이든가 어디에서 시원하게 배설하던 그 쾌감! 나는 지금도 그곳  퀴퀴한 화장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도 우리의 소화기관과 같다. 막히면 답답하고, 풀어줘야 할 때 풀어주지 못하면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바로잡아 줄 어른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굽은 채 자라도 바로잡아 줄 선생님도 많이 줄어들었다. 잘못된 자유의 범람으로 모든 것이 서로 얽혀도 풀어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아 교통이 막히고 경제가 막히고 미풍양속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 누군가 근심 걱정이 술술 풀리는 해우실(解憂室)로 우릴 인도할 수는 없을까.

  • 깨어진 추억

    깨어진 추억

    淸羅 嚴基昌

     내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울진에 가던 날엔 2월인데도 어느새 성큼 봄이 와 있었다. 먼 산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금방이라도 연초록 잎새를 토해낼 것 같았고, 오랜만에 보는 동해바다는 쪽빛으로 푸르러 있었다. 내가 울진에서 해안소대장을 하다가 제대한 지가 1976년 6월이니 벌써 30년이 지난 까마득한 옛날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그리움을 느끼면서도 젊은 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쉽게 와보지 못하였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가 기성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이 너른 바다와 마을들과 바위들의 정겨운 모습. 내 젊은 날에 보던 동해가 거기 고스란히 누워있었다. 사동을 지나면서 잠깐 멈춰 해안 바윗길을 바라보았다. 거기 바닷가 산 밑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내가 근무하던 소초(소대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나올 것이다.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은빛으로 반짝이던 하얀 백사장.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파도소리에 깨어나던 곳.

     달밤이면 이 소위(대령으로 예편)가 나를 불렀었다. 달빛이 너무 밝으니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근무하는 소대원들이 볼까 두려워 술병 하나 감추고 이소위 부대 쪽으로 갈 때면 월광이 출렁이는 바다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양 소대 근무지 중간지점의 백사장에서 만나 술 한 잔에 달을 띄워 마시며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시국 이야기도 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다시 순찰을 돌며 돌아올 때 바다와 달과 술, 그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초 아이들은 간첩이 오는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고, 중대장님(대령으로 예편)이 순찰 오시는 도로 쪽을 경계했었다. 중대장님의 오토바이가 우리 부대 쪽으로 들어오면 즉시 전화로 연락을 했고, 나는 부대원들의 근무상태를 점검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중대장님은 바둑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소초로 들어오시면 바둑으로 유혹을 했었다. 바둑판을 잘 보이도록 내무반에 놓아두고

     “중대장님, 바둑 좀 느셨어요?”

     “왜, 한 수 하자고?”

      바둑 한 번 붙으면 그 날 우리 소대 순찰은 끝이었다.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눈치 빠른 일국(당시 병장)이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계란을 풀어 라면을 끓여 왔다. 바둑의 판세는 내가 압도적이고, 그럴 때 여유를 부리며 먹는 라면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중대장님이 바둑만 두시다가 가시는 덕분에 늘 우리 소대 지적사항이 제일 적었었다.

     기성면 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척산리 가는 들길로 들어섰다. 한 번 다닌 길에 자국이 남는다면 수도 없이 내 흔적이 찍혀 있을 그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길 가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이전했는지 보이지 않고, 마을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조그마한 횟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 백사장 옆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소초로 들어가는 산길 옆 방파제 앞에서 나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옛날 조그맣던 방파제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확장되어 있었고, 소초로 들어가던 길은 뚝 끊어져 있었다. 울퉁불퉁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해변을 억지로 걸어 소초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충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초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름이면 소대원들과 수영을 하며 놀던 백사장도 파도에 휩쓸려 가서 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백사장 가 바위틈 여기저기에 어디에선가 떠내려 온 부유물들이 쓰레기장처럼 널려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에 찾아갔다가 무참히 헐리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커다란 상실감에 일어설 줄 몰랐다.

     아름다 운 추억은 아름다운대로 가슴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산에 핀 꽃은 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듯 그리운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리고,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 닭서리


    닭서리


    淸羅 嚴基昌
     얼마 전 고향 친구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끼리 저녁이나 먹으려고 하니 시간 있으면 참석해 달라 한다. 일 년에 몇 번씩은 방문하는 고향이지만 도회에 나와 살면서 고향을 생각하면 늘 솔바람소리, 뻐꾸기 울음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친구들은 거의 떠나고 없지만 눈을 감으면 친구들의 얼굴은 늘 거기에 있고, 어릴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보석처럼 간직되어 있는 곳이기에, 타향의 거리를 헤매다가 외로움을 느낄 때면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늘 심심하지 않고 즐거웠다. 봄이면 얼음 풀리는 도랑에 나가 가재를 잡아 구워 먹고, 여름이면 냇물에 나가 미역을 감으면서 수박이나 복숭아 서리 할 음모들을 꾸몄다. 별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도 마냥 재미있어 깔깔거렸다. 가을이면 남의 밤나무 밑을 어정거리다 쫓겨 달아나기도 하고, 겨울이면 토끼몰이를 한다고 온 산을 헤매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겨울밤 우리 조무래기 7, 8명은 친구 집에 모였다.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그 친구의 부모님께서  부산에 가고, 남매만 달랑 남아 밤이 무섭다고 하기에 집도 보아줄 겸 신나게 놀아보자는 계획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가며 귀신 이야기도 하고, 윷도 놀고, 베개 싸움도 하다가 열 한 시가 넘어가자 입이 출출해졌다. 생고구마를 깎아 먹어도 동치미를 꺼내어 먹어도 우리들의 허기증은 가시지 않았다. 한 친구가 은밀하게 닭서리를 하는 게 어떠냐고 하였다. 아무도 망설이지 않고 재미있겠다고 눈을 반짝거렸다. 가위 바위 보로 닭을 잡아오는 행동대원을 3명 뽑고, 2명은 닭을 잡고, 나머지는 물을 끓이고 양념을 준비하는 조로 나누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지 물 끓이는 조에 뽑혔다. 행동대원으로 뽑힌 친구들이 밖으로 나간 지 한 시간쯤 지나 큰 닭 두 마리를 잡아왔다. 우리 작은 악당들은 약간의 두려움으로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며 닭을 죽인 뒤에 이미 끓여놓은 물에 담갔다가 닭털을 뽑았다. 내장을 꺼내어 간이나 콩팥 등의 먹을 수 있는 내장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으슥한 땅에 묻었다. 무슨 요리사라도 된 듯이 마디씩 지껄이는 말들에 따라 마늘도 넣고 파도 넣고 그냥 푹 삶아 소금을 찍어 먹었다. 어설픈 요리솜씨임에도 우리들의 시장기는 순식간에 닭 두 마리를 뼈만 남겨놓았다. 새벽녘 헤어질 때 우리는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처럼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잡고 이 비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집에 돌아와 살풋 잠이 든 듯한데

     “아이고 우리 닭. 아이고 우리 닭”

     어머님께서 외치시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벌써 새벽이 되어 날이 부옇게 밝았다. 닭장에 뛰어가 보니 큰 닭 두 마리가 없어졌다.

     “나쁜 놈들, 약아빠진 놈들……”

     이제 와 생각하니 친구들이 잡아왔을 때 왠지 그 닭들이 낯익었던 듯도 하다. 그런데 우리 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 닭서리 하다가 발각되어도 자기 아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어쩌려고 하는 고 놈들의 속셈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지만 이제 공범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같이 걱정하고 있는 아들이 범인인줄도 모르고 분해 펄펄 뛰시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 고향은 쓸쓸해 졌지만, 허전할 때면 가슴 설레고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 개구리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 소리


    淸羅 嚴基昌

      어린 시절 못자리 할 무렵의 봄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개구리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산 그림자가 내려와 더욱 으슥한 산 다랑이 논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개구리들은 울어대고, 건너 마을의 삽사리도 따라 울어 더욱 정취 그윽한 마을을 꾸며놓곤 하였다. 먹을 것이 귀해 늘 배가 고팠지만,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마구 밀려들어오는 개구리울음소리에 취해 있노라면 살며시 졸음이 오고, 나도 모르게 행복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대전에 정착한 뒤로 나는 20여 년 간 거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논 하나 없는 도회 한복판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에 자동차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다. 먹고사는 것은 풍족해지고 걱정거리 하나 없는 생활인데도 어린 시절 개구리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던 그때만큼 숙면에 취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어쩌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그리워 고향에 가서 하룻밤을 새워도 개구리들은 옛날만큼 울지 않았다. 한 모금 울음으로 한 무더기 자운영 꽃을 피워내던 그 때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칩 무렵 깊은 산 계곡 속의 돌을 뒤집어 개구리들을 잡아내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개구리는 더욱 줄어들고, 살아남은 개구리마저 쉽게 사람들의 눈이 뜨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1년에 하루 밤쯤 개구리 울음으로 도회의 속진(俗塵)을 닦아내던 나에게도 개구리 울음은 참으로 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농약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깊은 산 돌 속에 숨어도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개구리들을 생각하며 참으로 가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봄이 익어가던 어느 봄 일요일 날 홍성 처가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칠갑산 산자락으로 난 도로를 돌아가고 있었는데, 열려진 차창 틈으로 문득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귀를 기울여 보니 내가 개구리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착각이 아니었나 싶게 딱 그쳐 있었다. 봄 풀 향기 그윽한 도로 가에 차를 멈추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고 있었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개구리 울음 하나 지나갔다.

    별똥별처럼
    타버리고 다시는 반짝이지 않았다.

    칠갑산 큰 어둠은
    돌 틈마다 풀꽃으로
    개구리 울음 품고 있지만

    기침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
    가슴을 닫았다.

    차창을 더 크게 열어봤지만
    청양을 다 지나도록 청양 개구리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개구리 울음. 유성처럼 한 번 빛나고는 다시 타오르지 않는 개구리 울음. 칠갑산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기척이라도 들릴까봐 꼭꼭 숨어있는 개구리의 두려움과 슬픔을 생각하며, 지구상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횡포가 심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인간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차창 문을 크게 열어봐도 다시는 들리지 않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모처럼의 봄나들이가 아쉽고,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