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엄기창

  • 세월 속에서

     

    세월 속에서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세월 가는 걸

    잊다가

     

    내 신발 신발장 밖으로

    밀려나는 줄도 몰랐네.

     

     

    2014. 4. 17

  • 민들레 편지

    민들레 편지

     

    오늘 밤 띄워 보내는

    홀씨 한 올엔

    전화로 드릴 수 없는

    내 사랑 진액만 담았습니다.

     

    달빛 파도 타고

    날고 날아서

    두견새 각혈처럼

    그대 창문 두드릴까요?

     

    밤새 뒤척이는

    그대의 꿈밭 머리에

    어둠 깎아 빛을 세우는

    까치 소리 한 소절 싹틔우고 싶어

     

    지난겨울 눈보라에

    씻고 씻어서

    남모르는 담 밑에서

    몰래 키운 마음 한 포기

     

    뿌리 떼고 줄기 떼고

    향기마저 걸러내고

    꽃 중에도 가장 간절한

    심장만 보냈습니다.

     

    2014. 3. 26

     

     

  • 독도

    독도

     

    그리움의 높이만큼 해당화 꽃 하나 켜고

    피멍울 속울음을 파도에 갈고 갈아

    대양의 폭풍우 향해 질긴 날을 세운다.

     

    먼 수평 하늘가에 흰 돛 한 폭 나부끼면

    설렘을 먼저 알고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

    사랑은 사치이로세. 마음 다시 다잡는 섬.

     

    2014. 3. 13

  • 황사黃砂

    황사黃砂

     

     

    제주에서 날아올라 청주 공항 오며 보니

    바다도 산도 마을도 황사에 잠겨 있다.

    봄 물기 오른 산하가 딸꾹질을 하고 있다.

     

    옛날부터 찾아오던 봄 불청객 고비 황사

    대륙의 몸부림에 독기까지 배어 있다.

    뻐꾹새 울다 목메어 자지러진 회색 빛 숲.

     

    집집마다 창 내리고 앞산도 멀어지고

    비질 된 골목처럼 비어가는 반도의 거리

    일찍 핀 나뭇잎들만 분 바르고 서 있다.

     

    차 한 대 없던 옛날도 편서풍 따라 봄에

    서해 건넌 모래 먼지 송화처럼 내렸는데

    증명할 방법 있냐고? 후안무치한 놈들!

     

     

    2014. 2. 2

  • 천 년의 미소

    천 년의 미소微笑


     

    불이문不二門 들어서니

    사바는 꿈 밖에 멀고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磨崖佛

     햇살 같은 미소,

     

    암심巖心으로 질긴 뿌리를 내려

    천 년을 깎아내도 웃음은 못 지우고

    어깨 팔 떨어진 조각만

    세월 흔적 그렸다.

     

    그 웃음 퍼내다가

    마음에 새겨 두고

    잘 적 깰 적 떠올리며 웃는 연습을 한다.

     

    오늘도 아픔이 넘쳐나는 거리에

    천 년을 지워지지 않는 마애불磨崖佛, 그 미소를

    등불처럼 환하게 걸어놓고 싶다.

     

     

    2014. 2. 26

  • 누님의 수틀

    누님의 수틀

     

     

    누님이 두고 간 빈 수틀을

    다락방 구석에서

    오십 년 지나 찾아냈는데

    누님이 수놓았던 꿈밭 머리에

    내 꿈도 얼룩처럼 피어있었다. 

    봄나물 향기 캐던 골짜기에는

    첫사랑의 산수유꽃 벌고 있었고,

    모깃불 향기 안개처럼 흐르던 밤

    지천으로 반짝이던 개구리 울음은

    별이 되려 반딧불로 솟아올랐다. 

    누님이 수놓았던 십자수 속에

    회재 고개 너머로만 한없이 뻗어가던

    그리움의 바람도 불고 있었고,

    끼니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눈망울과

    몇 방울의 내 눈물 쑥대풀로 키워주던

    구성진 소쩍새 울음 깨어나고 있었다.

    누님이 두고 간 빈 수틀엔

    비어서 더 가득한 내 어린날이

    색실보다 더 고운 내 이야기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살아나고 있었다.

    2014. 1. 24

     

  • 첫사랑

    첫사랑



    첫사랑은 늘

    누런 코 훌쩍이던 일곱 살

    코찔찔이 시절에 온다.

    삘기를 뽑아도

    찔레를 꺾어도

    엄마 얼굴보다 먼저 아른거리던

    마을 누나의 얼굴은

    매운 세월의 바람 속에

    덧없이 시들었다가

    인생이 저무는 예순 살 무렵

    어느 깊은 산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슬픈 전설을 만나면

    아픈 옹이처럼 심박혀

    움츠러들었던 그 어린 날 진달래꽃은

    불길처럼 피어나

    온 산을 물들이라 한다.

    모든 것을 빨아먹는

    늪인 줄 알면서도

    온몸을 던져서 투신하라 한다.

     

    2014. 1. 30


    <대전문학> 2014년 봄호(63호)

  • 思父 一曲 – 눈길

    思父 一曲

     

    눈길

     

     

    아버님 제삿날 저녁 때늦은 春雪로

    설화 곱게 피어난 연미 고개 넘으면서

    雪花 속 아롱거리는 아버님 모습을 본다.

     

    개학 전날 暴雪로 교통이 두절되어

    오십 리 넘는 公州 아들 혼자 가는 길에

    마음이 애틋하셔서 따라 나선 아버지.

     

    눈보라 칼바람에 온몸 꽁꽁 얼으셔서

    우성 지난 길가에 주저앉아 떠시면서도

    내 옷깃 여며주시던 모닥불 빛 그 손길

     

    금강 건너 도심에 한 등 한 등 켜질 무렵

    “네 덕분에 먹고 싶던 짜장면 먹는구나”

    허기진 젓가락 들어 덜어주던 아버지

     

    이제는 짜장면 천 그릇도 살 수 있네.

    짜장면 잡숴주실 아버님이 안 계시네.

    춘설은 풍요로워도 구름처럼 허전한 길.

     

     

     

    2014. 1. 10

     

     

  • 닭서리

    닭서리

     

    친구 부모 원행 간 집 동네 조무래기 모두 모여,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해 닭서리를 하였는데, 암탉, 수탉 서너 마리

    가마솥에 푹푹 삶아 미친 듯이 뜯다 보니 백골만 다 남았네.

     

    아침에 닭장에 가신 어머니 비명소리에 혼백이 다 날아가 소화된 닭이

    넘어올 듯…….

     

    2013.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