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엄기창

  • 첫사랑

    첫사랑



    첫사랑은 늘

    누런 코 훌쩍이던 일곱 살

    코찔찔이 시절에 온다.

    삘기를 뽑아도

    찔레를 꺾어도

    엄마 얼굴보다 먼저 아른거리던

    마을 누나의 얼굴은

    매운 세월의 바람 속에

    덧없이 시들었다가

    인생이 저무는 예순 살 무렵

    어느 깊은 산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슬픈 전설을 만나면

    아픈 옹이처럼 심박혀

    움츠러들었던 그 어린 날 진달래꽃은

    불길처럼 피어나

    온 산을 물들이라 한다.

    모든 것을 빨아먹는

    늪인 줄 알면서도

    온몸을 던져서 투신하라 한다.

     

    2014. 1. 30


    <대전문학> 2014년 봄호(63호)

  • 思父 一曲 – 눈길

    思父 一曲

     

    눈길

     

     

    아버님 제삿날 저녁 때늦은 春雪로

    설화 곱게 피어난 연미 고개 넘으면서

    雪花 속 아롱거리는 아버님 모습을 본다.

     

    개학 전날 暴雪로 교통이 두절되어

    오십 리 넘는 公州 아들 혼자 가는 길에

    마음이 애틋하셔서 따라 나선 아버지.

     

    눈보라 칼바람에 온몸 꽁꽁 얼으셔서

    우성 지난 길가에 주저앉아 떠시면서도

    내 옷깃 여며주시던 모닥불 빛 그 손길

     

    금강 건너 도심에 한 등 한 등 켜질 무렵

    “네 덕분에 먹고 싶던 짜장면 먹는구나”

    허기진 젓가락 들어 덜어주던 아버지

     

    이제는 짜장면 천 그릇도 살 수 있네.

    짜장면 잡숴주실 아버님이 안 계시네.

    춘설은 풍요로워도 구름처럼 허전한 길.

     

     

     

    2014. 1. 10

     

     

  • 닭서리

    닭서리

     

    친구 부모 원행 간 집 동네 조무래기 모두 모여,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해 닭서리를 하였는데, 암탉, 수탉 서너 마리

    가마솥에 푹푹 삶아 미친 듯이 뜯다 보니 백골만 다 남았네.

     

    아침에 닭장에 가신 어머니 비명소리에 혼백이 다 날아가 소화된 닭이

    넘어올 듯…….

     

    2013. 12. 15

     

     

  • 동행(同行)

    동행(同行)

     

    누군가 새벽 산길

    혼자 넘은

    외발자국

     

    그의 삶에 기대면서

    그의 마음 밟고 간다.

     

    외로운

    눈길에 깔아놓은

    털옷처럼 따스한 정.

     

     

    닫은 문 귀를 열면

    앞서 간 이

    내미는 손

     

    어디선가 밀어주는

    함성 소리 밟고 간다.

     

    고갯길 막막하여도

    인생은 동행이다.

     

    2013. 12. 11

     

     

  • 어느 가을 날

    어느 가을 날

     

    회초리를 놓고서

    국화꽃을 들고 간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하늘빛을 닮은 가을날에

     

    교실 구석엔

    아직도 오지 못한 한 아이의 자리

    어둠에 묻혀 있고

     

    일찍 들어선 겨울이

    군데군데 눈처럼 쌓여

    그림자를 만드는데

     

    땡감 맛 논설문을 배울

    교과서는 덮어놓자.

    꽃물 번져가는 교정의 나무들 꿈꾸는  

    무지개 빛깔 시 한 수 읊어보자.

     

    국화 향 은은한

    시로 닦아낼 수 있는 그늘이

    아주 작더라도

     

    한 발짝 먼저 나가지 않으면

    어떠리.

    아이들 마음이 풍선으로 떠올라서

    하늘에 닿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2013. 11. 10

     

     

  • 바다

    바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

     

    2013. 10. 23

     

  • 미소 지킴이

    미소 지킴이

     

    미소가 등불처럼 고여 있는 아내의 입가

    수삼 년 꽃 못 피운 동백나무 심고 싶다

    미소를 자양분 삼아 꽃잎 활짝 피어나게

     

    어렵게 피어난 꽃 온 계절 지지 않게

    작은 내 관심에도 햇살 같은 아내 얼굴

    행복한 아내 얼굴에 미소지킴이 되고 싶다.

     

    2013. 10. 20

     

    2013년 <문학사랑> 겨울호

  • 序詩

    序詩

     

    황토 물에 떠내려가는

    母國語

    한 조리 일어

    내 시를 빚었다.

     

    거친 모래밭에 피어난

    풀꽃 송이들아

     

    반딧불로

    불씨를 살려

    사람들의 가슴마다

    진한 香氣의 모닥불을 피워 주거라.

     

    2013. 10. 12

  • 廢寺의 종

    의 종

     

    빛 단풍이 타오르는 골짜기에

    기와지붕 허물어져 비새는 절 추녀 끝에

    썩다 만 조롱박처럼 매달린 종 하나.

     

    오랜 세월 울지 못해 울음으로 배부른 종

    소쩍새 울음으로 달빛으로 키운 울음

    종 벽 속 꿈틀거리는 용암 같은 피울음.

     

    이순 넘은 삶의 망치 꽝 하고 두드리면

    산사태 몰아치듯 사바까지 넘칠 울음

    종 채를 들었다 놨다 가을 해가 기우네.

     

    2013. 10. 9

     

     

  • 마곡사에서

    마곡사에서

     

    산문(山門)의 천왕님은

    아직도 눈을 부라리고 있다.

     

    묵언(黙言)의 입 꼬리에

    몇 올

    밧줄 같은 거미줄 걸고

     

    내 다섯 살 여름 무렵 첫 대면에  

    불타던 그 화산

    아직도 눈빛에 이글거리고 있다.

     

    옷을 털고 또 털어도

    털어낼 수 없는

    업연(業緣)의 질긴 먼지들,

     

    쓸쓸히 돌아서서

    태화산 그림자에 묻혀

    세상도 부처님도 모두 잊으니

     

    일체의 업장(業障) 쓸어내듯

    마음 속 울려주는

    늦여름 매미 소리…….

     

    2013.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