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2017년 02월 23일

  • 슬픔을 태우며

    슬픔을 태우며

                                          엄 기 창


     

    미루나무 그림자가 노을 한 자락 걸치고 있는

    금강 변에 서면

    품고 온 슬픔이 없는데도 가슴에서 피가 난다.

     

    착한 것도 죄가 되는가!

     

    백제의 산들은 왜 모두 모난 데 없이 둥글기만 해서

    적군의 발길 하나 막지 못한 것이냐.

     

    나라 없는 백성들은 질경이처럼 짓밟혀서

    꺾여도 꺾여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역사의 속살을 가리려고

    바람은

    투명한 수면에다 주름을 잡아놓는가.

     

    짠한 눈물 몇 종지 스스로 씻어내며

    세월의 골짜기를 흐르는 금강

     

    강변에 불을 피우고

    남은 슬픔 몇 단 불 속에 던져 넣는다.


    약력 

    1975시문학으로 등단.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시집 서울의 천둥』 『가슴에 묻은 이름』 『춤바위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

    <대전문학상> <호승시문학상> <하이트진로문학상> 대상 <정훈문학상> 대상

    <대전광역시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시작 노트

     

    나는 백제라는 이름만 읊조려도 눈물이 난다. 역사 속에서 사라질 때 슬프지 않은 나라가 있겠느냐만 공주나 부여에 가면 유독 슬픈 전설이 많고, 어린 시절부터 그런 전설에 묻혀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면 백제의 얼굴 표본이라 한다. 둥글둥글 모난 데 없이 원만한 게 서산 마애불이나 석불들의 모습과 닮았단다. 문화재 속에 드러난 백제인의 얼굴들은 모두 더없이 친근감 있고 평화로운 모습인데 왜 백제의 역사는 비극으로 인식되는 걸까. 아마도 3국 중에 제일 먼저 망한 나라가 백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백제에 관한 시를 몇 편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맨 첫 번째 쓴 시가 이 슬픔을 태우며이다. 열 편 쯤 만들어 다음 시집에 펴내고 싶다. 슬픔을 태우고 백제의 전설들을 그들의 얼굴처럼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싶다.